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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우리가 앉았던 자리는 그대로인데..."

by 수 윤

한여름의 태양빛보다 뜨거웠던 기말고사가 지나가고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여름 계절학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요일부터 계절학기를 시작한 덕분에 운이 좋은 나는 월요일에 예비군을 갈 수 있었다.


"그날 저녁 같이 먹을까?"

네가 물었다.

"정말? 집에서 저녁 안 먹고 와도 괜찮겠어?"

내가 대답했다.

"그럼~ 약속 있다고 하면 되지."

"나는 그럼 좋지~"


30도에 다다르는 햇빛 아래에서 하는 예비군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마저도 너와 잡은 저녁 약속은 나를 계속 웃음 짓게 만들었다.


"00아, 나 이제 끝나서 6시 반까지 집 앞으로 갈게! 날씨가 더우니까 1분 전에 나와!"

"응! 고마워!"


저 멀리서 네가 뛰어왔다. 1학년 때 파란 셔츠를 입은 모습에 두 번 반했다는 나의 말을 기억했는지 너는 파란 셔츠를 입은 채로 뛰어 왔다. 아마도 넌 쿨톤일 듯싶다. 파란 계열의 모든 옷들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오빠가 좋아하는 파란 셔츠 입어봤어!"

"그니까! 멀리서부터 보였어! 엄청 예쁜데?"

"히히. 오빠도 군복 입었네!"

"맞아~ 배고프지. 빨리 밥 먹으러 가자!"


20대 초반의 여자가 전역한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실로 다행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군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 그렇기에 예비군은 1년에 단 하루 군복 입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의 날이다. 그녀에게 군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군복을 입은 채로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입기 싫었던 군복이 오늘만큼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내가 좀 여러 곳 찾아봤는데 양식이 좋아 아니면 일식이 좋아?"

"음.."

"골라와도 못 정하지."

"하핫.."

"그러면 이거 먹을까? 카레 들어간 거 맛있어 보이던데."

"좋아. 근데 내가 오늘 점심으로 카레를 먹어서.."

"아 그래? 그러면 카츠 먹으러 갈까?"

"오, 카츠 좋아!"


우리는 전주에서 꽤나 유명하다던 인스타그램에 자주 나오는 곳에 갔다. 그녀와 둘이 함께하는 식사가 오랜만이었던 나는 괜히 어색한 감정을 느꼈다. 같은 곳을 마주 보는 자리에 우리는 앉았다. 왼쪽 얼굴이 더 괜찮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사람들이 많고 공간이 좁아 왼쪽 자리를 사수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스티커 사진을 찍었다. 누가 봐도 커플들이 할 것만 같은 행동들을 하면서.


"00아."

"응?"

"나는 연애할 때 네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냐면. 00이 친구가 00이한테 '수윤 오빠 누구랑 술 마시던데? 괜찮아?'라고 물으면, 네가 '짜피 수윤 오빠는 나를 제일 좋아해서 괜찮아.'라고 답할 수 있는 그런 연애. 네가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더 많이 표현하고 싶어. 그냥 얘기해주고 싶었어."

"이미 나한테 큰 믿음을 주고 있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PX에서 산 ROKA 티를 건넸다. 전역한 남자라면 한 번쯤 여자친구에게 로카티 선물을 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룬 오늘이 행복했다.


"00아, 내일부터 여름 계절학기 시작하는데 우리 지금까지 학기 잘 견뎌온 것처럼 이번 계절학기도 잘해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주니까! 3주 동안 잘 부탁해!"

.

.

.

"응! 나도 잘 부탁해."




슬프게도 저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우리는 정확히 여름 계절학기가 끝나는 날 헤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뜨거울 것만 같았던 우리의 여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월요일까지만 해도 저렇게 달달했으며. 수요일에는 내년 자기 생일에는 김치찌개를 끓여달라며. 목요일에는 내 서울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 우리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금요일부터 너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미세한 차이를 나는 느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모르는 척을 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수업이 끝나고 너를 데려다주는 일. 그리고 우리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멍 때리는 일. 그게 다였다. 그게 내 여름의 전부였다. 너는 나의 하루 일과를 물어보지 않았다. 나의 하루 일정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별을 준비했을까 너는. 특정 사건이라도 있었으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내가 큰 잘못이라도 했으면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겠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우리가 앉았던 자리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너는 이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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