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할리스까지 데려다줄게."
"그래."
"매니저님 음료수 사가서 드릴까?"
내가 물었다.
"오 좋아! 나도 음료수 포장해서 집 가서 먹어야겠다."
그녀가 답했다.
꽤나 매니저님과 친해진 우리는
종종 음료수를 사가곤 했다.
나는 매장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그녀는 포장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신호등까지만 데려다줄게."
"그래."
.
.
.
"다음에 건너면 안 돼?"
"아 진짜 마지막이다."
(우리는 신호등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 공부하기 싫어."
"근데 나도 공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두 번 신호 지나면 그때 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가지고 있던 빨대를 뺏었다.
"손 줘봐."
그러곤 그녀의 손에다가 글자를 적었다.
"나 이런 거 진짜 잘 맞춰."
.
.
"못 맞추는데?"
"아니.. 등에다 해봐. 등은 진짜 잘 맞춘다."
('안녕하세요'라고 적었다.)
"안녕하세요. 에이 쉽네."
(꽤 여러 단어와 문장을 적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 뭐라고 적었는지
자세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떤데. 잘 맞추지?"
라는 너의 말을 듣자마자
한 생각이 뇌리에 박혔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아, 지금이다.'
.
.
1초.
아니, 0.1초.
아니, 0.001초.
아니, 0.0000001초.
사고의 영역에 누가 망치질을 해댔다.
모든 자연 요소가 지금이라고 말을 걸었다.
온도, 습도, 바람.
모든 것들이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야, 너 지금 고백해야 돼.")
중간고사 후에 고백을 생각했던 나로선
오늘이 그날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 지금 머리 괜찮아?"
"응? 머리? 괜찮은데?"
(갑자기 멍을 때리며 생각에 잠겼다.)
.
.
너와 나의 '친구'의 역사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려나.
고백받은 너의 표정은 어떨까.
우리의 마지막이 지금이라니
대단한 결말을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멀어짐에 과연 나는 괜찮을까.
그리고
우리 모두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
.
"여보세요? 뭐야 이 오빠 왜 이래."
"다시 뒤돌아 봐 봐."
나는 다시 빨대를 집었다.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후회', '상처', '행복', '관계'
'준비된 결혼'은 없다는 말처럼
'준비된 고백' 역시 없었다.
내가 하는 선택에 후회하지 말자며
지금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며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 선택하라고 한다면
'덤덤함.'
그리고 그 뒤엔
모든 감정들이 섞여 휘몰아치고 있는
거센 폭풍우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았고.
하나의 단어를 장난 삼아 던져 보았는데
그 단어조차도 역시 가볍게 맞히는 널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가느다란 빨대 하나로 전하는 진심이지만
한 번에 알아봐 주길 바라며
첫 글자를 뗐다.
ㄴㅓ
(큰일이다.
'나'로 시작했어야 했는데
'너'로 시작해 버렸다.)
.
.
.
ㅈㅗㅎㅇㅏㅎㅐ
(여기까지 적었을 때
'하.. 끝났다.
결국 저질렀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고
너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
.
ㄴㅏ
(그 와중에 '너 좋아해'로
끝냈어야 했는데
너와의 친구 사이를
1초라도 더 지키고 싶어
'나'를 적어버렸다.)
.
.
.
'ㄴㅓ, ㅈㅗㅎㅇㅏㅎㅐ. ㄴㅏ.'
"...?"
"왜.. 뭐.."
"에...?"
(이 반응에서 사실 끝났다 생각했다.)
"에????"
(갑자기 일어서서 도망을 갔다.)
"아니, 다시 앉아봐. 아직 안 끝났으니까.."
"너 내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알아?"
"아니? 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심이 조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인심이는 '인간심리이해' 대학교 과목이다.)
"진짜? 그때부터라고?"
"응. 너는 내가 남자로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당연히 있었지~"
"근데 우리 겨울에 약간 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시기가 있지 않았나..?"
"근데 나만 호감이 있나 내 착각인 줄 알았지."
"응? 뭐라고? 착각? 지금 착각이라고 했다?"
"..."
"그럼 지금은 어떤데."
.
.
.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설레는 감정과 걱정되는 감정을 동시에 가진 채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멋은 없었을지라도
담백했다.
모든 말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었기 때문에.
.
.
"말이 너무 길었는데, 정리해서 다시 말할게."
"응."
"나 너 많이 좋아해.
너의 이상형에 맞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어.
근데 너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한테도 안 질 자신 있어.
많이 부족한 나일수도 있지만
우리 진지한 관계로 만나보지 않을래?"
.
.
.
그녀가 대답한 부분은 적지 않겠다.
나는 대답을 알지만
여기는 열린 결말로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025년 4월 16일.
나는 길었던 8개월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고
너와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고 날짜가 우리의 1일이 되기를 바라지 않아
4월 17일을 1일로 하자며 말해주던 너였다.
기적이라는 단어는 정말 아껴 써야 하는 단어지만
그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기적' 말이다.
내가 너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네가 나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와 000, 과대랑 연애하네."
"아니 그니까. 어떡할 건데."
"뭘 어떡해. 안 헤어지면 되지. 절대 안 헤어질 거야."
"그래~"
.
.
.
.
바로 다음 날 교내 실습수업을 마치고
친한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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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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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000 선정 2025년 최고의 고백이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