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Just because you don't understand, it doesn't mean it isn't so.” (Lemony Snicket)
왜인지도 모르고 갑자기 의사 결정을 받게 되었다.
예전에 LG에서 신사업 아이디어를 고민하다가 3대 케어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시니어 케어, 키즈 케어, 펫 케어.
그중 펫 케어 산업을 보면서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드라이까지 해주는 기기 콘셉트를 구체화해보기도 했고,
주인이 집을 비웠을 때 강아지의 분리 불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아지와 놀아주고 밥도 주고 하는 펫용 로봇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펫용 로봇은 Prototype을 만든 후 고객의 집에서 실제 테스트까지 했었는데
고객의 피드백이 아무리 좋다고 보고를 드려도 사장님은 계속 부정적 피드백을 주셨다.
도저히 설득이 안 돼서 고민하던 차에 어느 날 사장님이 부르셨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앞으로 펫 케어 시장이 상당히 커질 것 같다며
지난 번 보여준 펫용 로봇은 사업적으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뭐지? 왜 갑지기 마음이 바뀌신건지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며칠 새 사장님 댁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거였다.
사모님과 따님이 거의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빠진 걸 보시면서
반려동물에게 이 정도로 마음을 쓴다면 펫을 위한 제품에는 기꺼이 지갑을 열겠구나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아무리 설명드려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것들이
직접 그 입장이 되고 보니 마음이 자연스레 움직인 것이다.
그때 다시 한번 느꼈다.
사람의 마음은 '논리'가 아니라 '입장'에 따라 움직이는구나.
객관적 데이터는 전혀 변한 게 없지만 처한 입장이 바뀌자 마음이 바뀌는구나.
옳은 의사결정 방식이든 아니든 사람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그 원리를 잘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날을 계기로 효과적인 소통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었다.
세상은 내 힘만으로는 살 수 없고 주변 사람들의 힘을 빌어 뭔가를 해낼 수밖에 없다.
결국 소통을 잘 해내는 게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소통은 목적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정보 전달'과 '공감 유도'
뭔가를 알려주기 위한 소통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소통 인가로 구분된다.
'정보 전달'은 뭔가를 알려주는 목적의 소통인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사실과 의견을 섞지 않는 것 과 사실을 빌어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교묘하게 자신의 의견을 섞는 사람이 있다.
본인의 생각을 사실처럼 포장을 하거나 때로는 일부러 거짓을 섞어 넣기도 한다.
당장은 박식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탄로 나게 마련이다.
양치기소년의 우화처럼 다음엔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모르는 것을 사실처럼 말하고 싶은 유혹을 견뎌야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사실과 진실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몇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전혀 다른 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통계를 의도대로 잘라서 부분적으로 사용한다거나
몇 가지 유사한 사실을 묶어 결론을 부풀리거나 하는 경우다.
투자팀장 시절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투자를 했을 때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LG 헬스케어 신사업 잰걸음"이라고 떴다.
과거에 LG가 추진했던 헬스케어 관련된 것들을 모아서 나열하고는
드디어 헬스케어 신사업에 본격적으로 힘을 싣기 시작했다고 결론을 지었다.
매우 불편했다. 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투자를 한 것도 사실이고, 과거에 그런 활동을 했던 것도 모두 사실인데
헬스케어 신사업을 본격 추진한다는 결론은 진실이 아니었다.
투자를 한 후 바뀐 것은 주주로서 해야 할 일이 추가되는 것 뿐이다.
몇 억 투자했다고 갑자기 신사업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투자는 투자고 신사업은 신사업이다.
사실 몇 개를 엮어 실체 없는 진실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공감유도'는 말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켜 동의를 구하는 것인데
이걸 잘하기 위해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명확함과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 두 가지다.
잘 모르는 것에 공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방의 공감을 끌어내려면 충분히 이해를 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고
내 생각이 명확히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가끔 스스로도 내용 숙지가 안된 상태에서 발표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듣는 사람은 직감적으로 바로 알게 된다.
말하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설득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스토리에 집중하여 쉽게 설명하고 딱 한 가지를 공감시켜야 한다.
주변의 조각 정보들을 너절하게 나열하며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내가 말하고 싶은 포인트 하나에 집중해서 전달해야 한다.
복잡하면 공감되지 않는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준비하는데 수고한 만큼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말의 내용을 숙지하고 준비하느라 상대를 놓지는 경우가 많지만
의사결정의 키는 상대방이 쥐고 있어서 그를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상대방의 '성향'을 이해해야 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과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평소 어떤 단어나 태도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
성격이 급한 의사결정권자에게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설득되길 바랄 수는 없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의사결정권자가 최근에 처한 상황과 보고 받는 순간의 기분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비합리적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사람은 원래 비합리적이다.
예전에 프로야구에 진심인 CEO가 있었는데
그분이 응원하는 팀이 진 다음 날에는 보고일정을 연기하는 임원도 있었다.
그때는 비겁한 것 같았지만 지금 보니 그분이 현명한 거였다.
보고 일정 하루 이틀 바뀌는 게 뭐가 중요한가. 의사결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결정이 중요한 상황에서는 Surprise가 최악이다.
완벽한 보고서를 기다리지 말고 수시로 가서 경과를 업데이트하고 피드백을 받아 조율해야 한다.
나중에 보고를 받을 때쯤이면 너무 익숙하여 마치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느낄 것이다.
군주에게 조언을 할 때는
그가 잠시 잊어버린 무언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행동해야지
그가 보지 못하는 빛을 보여주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발타사르 그라시안, 세상을 보는 지혜 中에서)
언젠가부터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늘 상대방의 성향과 입장을 먼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입에서 떠난 말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귀에 도달할 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의도가 중요한 만큼 상대방의 해석도 존중받아야 한다.
좋은 소통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상대방이 듣고 싶은 방식으로 해주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중에 그 위에 살짝 얹으면 된다.
그게 '정보 전달'이든 '공감 유도'든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사적인 대화든 공적인 보고든 모두 그렇다.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