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중앙선을 밟고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자동차에게 욕을 했다. 차선 하나를 통째로 막고 사선 주차 되어있는 차 엉덩이 뒤에 대고 또 욕을 했다. 비좁은 틈을 뚫고 차선을 변경해 내 코앞으로 갑자기 훅 들어오는 녀석에게도 욕을 했다. 늦은 등굣길 주욱 늘어선 자동차들이 그저 답답하고 밉다.
화수집품이 생겨 열심히 글을 쓰기로 했다.
“이 날아다니는 아기님 같은!”
멋지게 순화했다며 달복이에게 보여 주었다. 달복이가 글을 보더니 그런다.
“엄마, 글씨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할 수 없어요? “
아차 싶었다. 욕을 순화해 글에 넣는다고 욕이 욕이 아닌 것이 되지 않는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내 입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싶었다. 아이 보기 부끄러웠다.
운전만 하면 왠지 마음껏 화를 펼쳐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와 아이 넷의 생명을 위협하며 무법 난폭운전을 일삼는 모든 무생물들에게 욕을 해대도 꺼릴 것이 없었다. 문을 내리고 이야기는 못하고 그저 꽁꽁 숨어 목소리가 차 바깥으로 새나가지 않게 한 다음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욕을 해댔다.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야. 저 나쁜 차에게 이야기하는 거야.’라고 부러 아이들에게 말했다. 차에게 욕하는 건 욕이 아닌가?
가끔 조수석에 앉은 아이가 운전에 초 집중하는 엄마를 대신해 화를 내주면 내심 기쁜 마음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부모라는 사람이 이다지도 어리석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혼자 운전을 할 때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뿐 욕설을 내뱉지 않는다. 누구 들으라고 욕을 하며 누구에게 화를 내는 것인가.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자동차에게 화를 내고 욕을 했다. 하지만 왜 몰랐을까? 글씨에 모자이크 처리를 할 수 없냐고 묻는 순진무구한 아이 넷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잠자리 동화를 들려준들 무슨 소용이었던가.
등하교 차 안에서 아이들은 엄마의 욕설을 듣거나 왕초보 운전자 엄마의 운전을 방해 말라는 강압적인 명령을 들으며 입을 꾹 닫은 채 무슨 생각을 할까? 복실이는 깜깜한 퇴근길 차에 타기만 하면 그런다.
엄마 집에 가면 꼭 안아줘. 무서워.
그 말의 의미가 무언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어리석은 엄마다.
죄 없는 자동차는 무슨 죄인가. 그것이 사람이든 아니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욕을 하지 말자. 내 입을 가벼이 하지 말자. 고운 사람이 되자. 세상을 향한 나의 화풀이는 누구에게든 미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 화가 돌고 돌아 나에게 온다. 돌고 도는 게 인생사가 아닌가.
늘 입에 모자이크 처리된 투명 마스크를 쓰고 다니자. 여덟 개의 귀와 여덟 개의 눈동자가 늘 나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