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보나 Aug 13. 2024

고추가 열두 광주리

아침 이슬 맞으며 고추 따러 나간다. 밭에 한발 내딛으며 풀잎에 맺힌 이슬 방울이 퍽이나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슬은 금세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고추 한 골 따고 허리를 펴니 해가 중천인가. 아침부터 뜨겁다. 고추가 풍년이다. 두툼한 껍질을 곱게 두르고 뻘겋고 굵직한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이슬 맞을 것이 아니라 새벽 어스름이 밝아오기 전에 나갔어야 했다. 어매 사람 잡소. 태양 아래 고추가 왜 빨개지는 줄 알겠네. 얼굴도 고추 마냥 빨개지네.아부지 사람 잡겠소. 시뻘건 태양을 노려볼 생각도 못하고 창 넓은 농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입김으로 숨을 내뱉었다.


태양이 무겁다.


숨을 쉬려면 앞을 보지 말고 땅 아래를 보고 쉬어야 한다. 농부 아낙의 몸이 만들어 주는 그림자 아래 들숨 한 줌은 그나마 시원하였다. 처음에는 그랬다. 고개를 들면 뜨거운 공기가 코로 밀려 들어와 허파가 마르는 것 같다. 태양을 마주하지 말고 등지고 앉아야 한다. 그 사실을 두 골을 지나고 나서야 알다니. 키가 훌쩍 큰 고추나무 그늘에 들어가 어떻게든 몸을 구겨보려고 노력했다. 왜 해는 떠오르자마자 머리 위에서 빛나며 내 몸보다도 작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건가. 야박한 여름 태양이다. 창 넓은 모자도 별 소용이 없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기도 하는 자세로 고추를 딴다. 맞다, 고추를 잘 키워준 태양의 신에게 올리는 기도. 경건한 마음으로 두 무릎을 꿇고 두 손은 나무와 열매에 가져다 대었다. 풍요로운 수확의 감사는 없다. 고추는 주렁주렁 열리었지만 고추만 신났지 농부 아낙은 쪼그리고 앉은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 빨리 따고 밭에서 나가자 생각하며 두고 온 의자를 가지러 간다.


의자 소환. 요즘 김을 매며 몇 번 만나 친근한 의자다. 수평으로 360도 회전, 위아래로 움직이는 의자. 앞과 뒤 오토바이처럼 두 발을 달고 있는 철제 의자다. ‘회전 농사 의자’라고 인터넷 검색창에 치면 줄줄이 나온다. 고랑에 놓고 쓰기 아주 좋다. 평지에 두고 앉으면 앞, 뒤, 옆으로 쓰러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고추를 딸 때는 한 골로 나가면서 양쪽을 모두 따고 나가야 하니 회전의자가 편하다. 철제라 로봇처럼 삐그덕거리지만 허리를 숙여야 할 때 상하로 움직여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고추를 딸 때는 회전의자가 최고다. 더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허리와 다리 아픈 것이 덜하니 의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또 고마운 장비가 있으니 농사 바구니다. ‘쪼그리 바구니‘라고 또 인터넷 검색창에 치면 바로 나온다. 쪼그리 바구니에는 두 개의 끈이 달려있다. 연결된 끈 하나와 버클이 있는 끈 하나다. 착용방법 1. 연결된 긴 끈 사이로 머리를 들이 밀어 어깨 한쪽에 걸친다. 착용방법 2. 버클을 허리에 두른 뒤 채운다. 고추를 따서 바로 바구니에 넣을 수 있다. 손과 팔로 수확물을 들지 않아도 되니 허리에도 부담이 덜하다. 쪼그리 바구니에 고추를 가득 담아 밭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는 외발수레 위 농사 바구니에 쏟아붓는다. 쪼그리 바구니의 가장 큰 활약이 여기에서 발휘된다. 처음에는 몰라서 못 사용한 기능. 기능이라고 하기는 뭣 하지만 알면 획기적으로 노동력을 줄일 수 있다. 쪼그리 바구니 바닥은 옆 면과 지퍼로 연결되어 있다. 반달 모양의 불룩한 배 부분이 지퍼로 연결되어 열린다. 지퍼를 열면 수확물이 와르르 쏟아진다. 힘 하나 안 들이고 노란 농사바구니 삼분의 일을 옮기는 셈이다.


새로운 농사 장비를 열심히 만들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회전의자를 다시 찾아보니 양산도 달려 나온다. 변화에 발맞추어 양산까지 챙겨주시는 멋진 분들! 양산이 탐이 난다.


감사와 더불어 농부 아낙은 새로운 장비를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다.  등이 태양열을 흡수한다. 태양전지판이 따로 필요 없다. 햇빛을 반사하라고 일부러 입고 나온 흰색 잠바가 소용이 없다. 흰색 태양전지판이 효과 만점이다. 어깨도 넓고 등짝도 넓고 판판하니 참으로 따끈하다. 커다란 잠바는 왜 팔이 짧을까. 내 팔이 긴 것일까. 손을 뻗을 때마다 소매가 위로 딸려 올라간다. 토시를 하고 나올 것을 온몸을 보호한다고 둘러 입은 잠바는 장갑과 팔목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지나가던 노린재, 모여 놀던 노린재, 인간의 등장에 놀라 나무 아래로 잽싸게 착지하는 노린재들이  농부 아낙의 고운 피부를 넘본다. 잠바가 땀복인가 땀이 줄줄이 흐른다. 땀이 흘렀던가.


그러나 고추를 따야 한다. 지금이 가장 시원할 때이다. 해는 더 높이 오른다. 오늘이 아니면 다 익은 고추가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 물러설 수 없다.


농부 아빠가 때때로 물을 날라준다. 한 컵을 다 마셨다. 한 컵에서 조금 남겨 얼굴에 물을 부었다. 물이 최고다. 물을 들이붓고는 조금 숨쉬기가 편하였다.


농부 아빠는 반대편에서 고추를 딴다. 쪼그리고 앉아서 연신 다리가 아프단다. 엉덩이 의자라도 가지고 와 앉으라니 거부한다. 옆에서 고추를 따며 자꾸 잔소리를 한다. 빨간 것만 따란다. 농부 아낙은 빨간 것만 딴다. 그런데 따고 나면 초록과 붉은색이 섞인 약간은 덜 빨간 고추가 있다. 농부 아낙은 정말 빨간색 고추만을 따는데 이상한 일이다. 고추가 익는 것이 상하좌우 한결같으면 좀 좋을까. 해보는 쪽이 먼저 익는 것인지 바람 부는 쪽이 먼저 익는 것인지 위인지 아래인지 모르게 불긋불긋한 초록이 섞여있다.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빨강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의자가 아무리 회전이 된다고 하지만 고추를 빙 둘러 돌아가며 회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충 성격인 농부 아낙은 얼렁뚱땅 빨리빨리 한 바구니 담는데 주력한다. 그러니 색깔이 한결같지 않다. 반면 농부 아빠의 바구니는 느리게 차고 새빨갛다. 그대 곱고 곱소. 계속되는 잔소리에 빨간 것만 딴다고 냅다 소리를 지르니 농부 아빠는 그녀의 옆을 피해 다른 곳에 가 고추를 딴다.


농부 아낙의 손이 느려진다. 고추에게로 올리는 손이 무거워진다. 한숨 몰아쉬고 고추 한 개 담고, 한숨 몰아쉬고 고추 한 개 담고를 반복했다. 더는 못하겠다 선언하곤 어그적거리며 고추밭을 기어 나왔다. 고추 한 고랑을 남겨두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밭에는 들어가지 말자. 거실 바닥에 뻗은 시간은 9시가 채 안 되었다.


여름날 첫물 고추를 따려면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를 벗 삼자.  첫물 고추는 열두 광주리. 고추가 풍년이다. 뜨거운 태양이 만들어준 귀하디 귀한 빨간 고추가 열두 광주리.



이전 22화 뜨거운 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