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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Aug 20. 2024

고추를 따고 부자가 되었다

지난주에 이어 고추를 땄다. 해가 좋으니 잘도 빨개진다. 새벽부터 서두르자 마음먹었지만 일하기 싫은 몸을 자꾸 집에 붙들어 맸다. 겨우 꽁꽁 싸매고 나왔는데 첫발에 현관 앞에 있는 매미를 밟았다. 매미도 나도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 매미는 운명하여 현관 앞 가장 높은 계단 위에서 모래 덮인 작은 무덤이 되었다. 그건 천천히 만들어졌는데 개미의 조화인 것 같다. 다 들고 가기가 벅차 자신의 집으로 포함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꼬마들과 나는 매미를 피해 며칠을 직진으로 가지 못하고 우회로를 이용해 마당으로 내려갔다. 농부 아낙의 장홧발에 밟혀 생을 다한 매미의 극락왕생을 빌어본다. 녀석의 친구들도 목소리가 터져라 외치고 있다. 잘 가라!


매미와의 사고 후 고추밭에 앉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놀란 마음도 놀란 마음이지만 그 녀석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 더 마음 쓰였다. 작은 곤충은 손으로 쓱쓱 밀어내며 고추를 땄다. 고추밭에는 노린재가 산다. 노린재 크기는 매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노린재가 사는 곳에 고추가 심긴 것 같다.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고추나무 아파트 주인이 나요! 노린재가 전세 낸 집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농부 아낙은 들은채도 안하도 요란하게도 고추 꼭지를 끊어 내었다. 날아가다 뒤집히고 우수수 떨어지고 뛰어가고 그네들 마을에 한 바탕 난리가 났다. 몇 발자국 날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는 꼴이란. 착지는 대부분 실패하여 뒤집히는 꼴이란. 사람 사는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고추가 많다. 두 번째 따는 고추가 가장 많다고들 한다. 한 주 밖에 안 지났는데 한 2주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익기도 잘 익는다. 고추는 쨍한 태양이 좋은가 보다.


나는 쨍한 태양이 힘들다. 땡볕에 오래 앉아 있지 않고 두 세 바구니 쏟아 놓고 그늘에 앉아 느긋하게 쉬다 또 밭으로 들어간다. 쉬는 동안 물을 머금고 얼굴에 물도 뿌리고 열을 식힌다. 그래도 바람은 지난주 보다 선선하고 막무가내로 태양과 마주하지 않으니 좀 견딜만하였다. 그런데 얼굴에 고추분을 바른 것 같이 따갑다. 물을 계속 뿌려대서 그런가? 얼굴 노출 부위가 화끈 거린다. 태양을 마주 보는 것도 아니고 반사열에 익어가는 내 얼굴. 이미 빨개진 고추의 얼굴을 면면히 살피며 바구니에 넣는다.


밭에 나와 있으면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풀벌레가 울어대고 새가 떠들고 난리다. 숲 속은 전혀 한가롭지 않다. 동물의 소리는 알아듣기 힘드니 잠시 그들의 경쟁과도 같은 삶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자연스레 농부 아낙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숲에 둘러싸인 밭에서 명상일까? 고추나 다른 식물, 벌레, 날아다니는 곤충들과 교감한다. 그건 농부 아낙의 희망사항이고 혼자 두런두런 혼잣말을 속으로 한다. 오늘의 수확물 빨간 고추와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 배우는 삶의 지혜.


고추에게서 배운다.


고추는 겉과 속이 다르다. 겉은 빨강이나 속은 하얗다. 겉이 더 매울까 속이 더 매울까. 속으로 기어이 들어가려고 하는 벌레를 보면 속이 덜 매울까? 벌레에게는 고추가 맵지 않을까?


고추의 한 면만 보면 안 된다. 사물의 모든 것이 그렇다. 그러라고 상하좌우 360도 회전 각이 있다. 다각도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자. 앞에서 보면 빨강 뒤에서 보면 검붉은 색으로 덜 익은 고추. 빨간 것만 따라는 농부 아빠의 잔소리를 묵묵히 견디며 사물의 단면만 보면 안 된다는 교훈을 귀가 따갑게 배운다. 농부 아낙은 정말 빨간 것만 딴다. 보이는 것을 안 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고추에 작은 구멍 하나를 뚫고 들어가는 벌레는 강력하다. 애벌레가 구멍을 뚫고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고추를 야금야금 먹어가면서,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엄마 곤충이 고추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을 수도 있겠다. 고추 속에서 애벌레가 탄생하면 생명을 보존하는 데 유리할 것도 같다. 매운 환경을 견딜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져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눈코입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뚫는 구멍은 딱 하나. 구멍 하나가 고추 전체를 망친다. 겉이 멀쩡해 보여도 작은 구멍 하나라도 보이면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아까워 말고 내던져라. 건조하면서 다른 고추까지 썩게 된다.



고추는 태양을 좋아한다. 빨간 고추야 너는  뙤약볕 아래 즐거워 보이는구나.  빨갛게 익어가는 농부 아낙을 보는 재미도 좋겠구나. 얼굴에 태양 빛이 쬐니 따사롭고 따갑구나. 내 고향 8월은 농부 아낙의 얼굴이 구릿빛으로 익어 가는 계절~~ 그러나 농사는 다 때가 있다. 주말 농부는 뜨거운 일요일을 그냥 보내버릴 수 없다.


이렇게 더운 날씨라면 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본다. 옆에서 생강밭 풀을 매고 있는 농부 아빠는 더 힘겨워 보인다. 고추밭은 그나마 양반댁이다. 생강 밭은 매도 매도 끝이 없는 밀림 숲이다. 가뭄이 심해 마른땅에 흙먼지가 인다. 생강 밭에 물을 줘야 한다며 그전에 풀부터 잡겠단다. 초록 풀숲에는 모기도 많다. 농부 아빠는 엉덩이에 모기빵이 많이도 생겼다. 역시 고추나무 동네는 양반댁일세. 부지런히 고추를 딴다.


밀림과 같은 생강밭
밀림과 같은 생강 밭


지난주에 딴 고추를 잘 말려 방앗간에 가져가 빻았다.  6.8킬로그램이 나왔다. 바싹 말린 것 치고는 색깔이 잘 나왔다. 그늘에 며칠, 건조기에 하루 말렸다. 건조기는 고추 농사 2년 차까지 말리기 원정을 다니다 3년 차인 지난해 중고로 구매했다. 고추는 따는 것도 따는 것이지만 말리는데 품이 많이 든다. 태양초를 만드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태양초 고추는 정말 태양을 사랑하는 농부님의 정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무지하게 넓고 건조한 온실이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


부자 된 기분이다. 일은 힘들어도 고춧가루를  획득하니 기분이 좋다. 고마운 분들과 나누어 먹고 김치도 열심히 담가 먹어야지.



방앗간에서 빻아온  비닐에 담긴 고춧가루를 나누어 담으려고 보관통도 샀다. 1100밀리리터는 650그램 정도 들어간다. 빈공병 500밀리리터도 100개나 인터넷으로 시켰다. 김치 냉장고에 가득 쟁여 놔야겠다. 고춧가루 부자가 되었다. 부자란 이런 기분이군. 넉넉하고 풍요로운 가을이다. 그런데 왜 한여름의 태양볕은 수그러들지 않을까.


오늘은 습도 90퍼센트, 이런 날은 아무리 더워도 고추가 마르지 않는다. 오늘 밤에는 건조기에 넣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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