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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화수집 18화

세탁기에서 화신이가 튀어나왔다.

by 눈항아리


중1이 된 복이. 청소년증을 만들어야 한다며 학교에서 안내장을 가지고 왔다. 월요일까지 내야 한다며 금요일 밤에 신청서를 내미는 친절한 복이.


토요일, 덥수룩한 머리도 좀 자르고 사진을 찍으라며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여주었다. 복이의 앞머리는 눈썹 아래 봉긋한 눈의 호선이 만나는 곳까지 내려와 있다. 눈을 찔러대기 전까지 불편함을 못 느끼는 아이는 머리 깎기가 귀찮단다. 자라는 길이로 봐선 다음 주쯤엔 잘라야 할 것 같은데 잘라주시지. 인생 처음 증명사진을 찍는데 예쁘게 단장을 하면 좀 좋아. 그러나 아이는 그저 귀찮아서 그냥 사진을 찍으러 가겠다고 했다. 그래 그러려무나 너의 청소년증이니 부끄러움도 너의 몫이다. 덥수룩한 머리는 컨셉이라고 생각하마.


아이는 그렇게 첫 증명사진을 찍으러 갔다. 요즘 들어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는 복이. 아이는 익숙한 편의점이 아닌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가며 행여나 사진 사이즈를 잘못 알고 왔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었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3*4 맞아?”


”그려 맞다. “

‘몇 번을 확인했잖냐.’


아이에게 친절한 말로 응대를 해준 뒤 일을 했다. 바쁘지만 친절한 엄마 행세를 잘했다. 사진을 찍고도 연락이 왔다. 아니면 내가 했는지도 모른다.


“잘 찍었어?”


“응, 5시에 찾으러 오래. “



7시가 되어 또 통화를 했다.


“찾아왔어?”


“응. “


사진을 잘 찾아왔단다. 우리 복이가 증명사진을 찍고 왔다. 생애 첫 신분증을 만들 거다.






기쁨의 순간은 짧다. 덧없는 행복이라고 했던가.


집에 오자마자 엄마는 세탁기를 돌린다. 세탁바구니 머리가 봉긋하게 올라오면 참을 수 없다. 하루에 두 번은 돌려야 하니 퇴근 후 바로 돌려야 세탁기에서 꺼내 건조기에 넣고 잠들 수 있다. 다음날 입을 옷은 엄마가 세탁기를 돌리기 전 미리 세탁바구니에 벗어 놓으면 자동 세탁된다. 며칠 미세먼지를 맞으며 자전거 놀이를 한 복이는 들어오자마자 회색 항공잠바를 떡하니 세탁바구니 머리 위에 얹어 두었다. 토요일에 또 입고 바람을 쐬러 가려나 보다. 아이의 옷을 가장 먼저 넣고 돌렸다.


그냥 평소와 같이 돌렸다. 주머니는? 주머니는 절대 뒤집어 보지 않는다. 세탁 후 500원이 나오면 엄마 꺼, 1000원이 나와도 엄마 꺼, 10000원이 나와도 엄마 꺼. 그러나 이번에 나온 종이쪼가리는 잠시의 행복한 상상을 처참하게 앗아가 버렸다. 3센티미터, 4센티미터 직사각형 누런 종이쪼가리가 세탁기 벽에 붙어 있다. 하늘에 별을 박아 놓은 듯 영롱한 노랑 빛을 발하며 어두운 세탁조 안을 비추고 있었다. 한데 뭉치지도 않고 어쩌면 그리도 여러 곳에 잘 붙박이로 붙어 있는지 물속을 잘도 떠다녔나 보다. 간혹 초록 잎사귀를 닮은 종이 조각도 나왔다. 백 원짜리 하나 빨래와 함께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다. 오늘의 소득은 100원과 처참하게 세탁기에 붙어버린 복이의 첫 증명사진이다. 그것도 얼굴은 죄다 세탁조에 처박았다. 그래 얼굴 들고 다닐 형편이 아니겠지.


사진을 하나하나 떼어내 거실 바닥에 던졌다.


화르르륵


그러고선 아이에게 다다다다 쏟아냈다.






그날따라 왜 아이는 잠바 빨 생각을 했을까. 왜 바로 벗어 세탁바구니 위에 던져두었을까. 왜 엄마는 오자마자 세탁기를 돌렸을까. 욕을 먹는 아이는 억울하다. 자신은 잠바를 벗어두었을 뿐인데. 사소한 불찰로 젖어버린 사진 속 얼굴만큼이나 복이의 멋진 얼굴이 원망으로 가득 찼다. 아이는 월요일날 당장 사진을 붙여 가지고 가야 한다며 사진이 담겨 있던 봉투를 찾는다. 그 봉투가 남아 있겠냐. 종이는 추풍낙엽 물과 함께 흘러가 버렸다 이 녀석아. 초록 잎사귀 나풀거리며 세탁기에 떠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 종이 한 조각이 되어버린 사진봉투. 아이는 사진 봉투의 사진관 이름을 찾고자 했다. 네이버에 물어보라며 윽박을 질렀다.




아이는 메일로 사진을 보내도 된다며 사진관을 찾는다. 문을 열고 들어는 갔지만 이름을 모르는 난생처음 가 본 사진관. 거실 바닥에 고이 던져둔 사진을 말려보고 붙여가지 못할 상황이라면 사진관에 전화해 원본사진을 메일로 받아 학교에 제출하면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방법을 일러준다고 말한 것이 아이에게는 또 잔소리로 들렸던 것일까. 이미 들어먹은 욕에 더한 잔소리에 기분이 상한 아이는 그런다.


“됐어. 내 돈으로 내일 가서 다시 찍을게!”


’그 돈도 내 돈이거든?‘


그래 이리 와라. 엄마랑 앉아서 어디 누가 이기나 얘기를 해보자. 아빠와 함께 아이를 앉혀두고 너의 잘못을 다시 읊어주었다. 아이는 아빠의 말에 더 토를 달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불을 꺼버렸다. 빈정이 상해 금요일 아빠와 함께하는 게임시간을 날려버렸다.


아이가 나를 많이도 닮았다. 나도 매번 그런데. 세상이 태클을 많이 걸기도 건다. 그날따라 건조기가 빨리도 돌아갔다. 이번에는 얼굴 쪽 면은 아예 하얀색으로 변한 종이가 나왔다. 증명사진이 분명한 3*4 크기의 직사각형. 화르륵 또 불타오른다. 베란다 쪽을 바라볼 때마다 눈에 띄는 종잇조각에 화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밤새 증명사진은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점점이 반짝이는 포인트 점 몇 개가 찍힌 희뿌연 사진이 바싹 마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상태가 썩 괜찮다. 첫 증명사진이라 튼튼한가 보다. 탄탄한 앞날을 비춰주는 반짝이는 포인트! 아이의 첫 신분증명사진으로 딱 맞춤이다. 복이는 청소년증 신청서에 손수 사진을 붙였다. 빈칸을 채우라고 엄마 책상에 고이 신청서를 올려 두었다. 아는 것은 다 채우고 달라니 제 이름만 떡하니 써넣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제 이름 하나뿐인 청소년 어린이 아들. 우리 복이의 첫 신분증명서가 나온단다.






세탁기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화신이는 장난이 심하다. 그려 오늘도 어김없이 굴림을 당하고 웃는다. 지나 보면 웃고 말 일이다. 실수로 그런 것을 어쩌란 말인가. 작은 실수에 버럭 화를 낸 내가 밉다. 그러나 그 상황에 소리를 안 칠 것인가? 작은 목소리로 곱게 이야기해야 할까?


자본을 무기로 큰 소리 치며 권력을 휘두르는 못되먹은 엄마로 찍혀버렸다. 사진 값이 아까워 소리친 것은 절대 아닌데 약자의 마음은 또 그게 아닌가 보다. 자신의 이름만 겨우 아는 청소년 어린이를 마음으로 보듬어 주자. 실수도 너그러이 품어줄 수 있는 태평양과 같은 마음을 가지자.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백번 엄마가 잘못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품어주고 실수를 괜찮다고 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다. 기다려 주지 못한 죄. 아이의 실수를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닌, 아이가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스스로 슬퍼할 시간을 주지 못한 것이 엄마의 죄다. 젖어 구겨진 점박이 사진, 세탁기에 반짝이 별처럼 박힌 사진을 스스로 떼어낼 수 있는 시간을 아이에게 줄 것을. 엄마가 할 일이란 잠시 기다리기. 아이가 슬퍼한다면 같이 슬퍼해주고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면 따라주어야 함을 이제서야 알게 된다. 느리게 배우는 엄마는 몇 번을 반복해서 그 상황을 재현하고 나서야 배운다.



아이가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아이가 슬퍼할 시간을 주자.
아이가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도록 기다려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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