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들깨가 거뭇한 고동빛이 되었다. 누워있는 들깨도 세워둔 들깨도 닮은 빛깔이다. 비 오기 전 털려고 너도 나도 모아 놓았다. 다른 집 다른 깨인데 날씨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는 농사일이다. 월요일엔 비 소식이 있다고 했다.
논두렁을 따라 심어놓았던 키 작은 콩나무. 뒷짐 지고 지나간 농부가 베어 놓았나 보다. 가는 밑동 잘려나간 마른 콩나무가 일열로 가로누웠다. 뒷짐 지고 살포시 논두렁 걸으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겹쳐 보인다. 고춧대도 잘려 누워있다. 푸릇한 무, 배추 뽑고 나면 이제 겨울이 오려나. 들녘은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길 가에 은행잎은 노랑물이 들어간다. 월요일 비가 오고 나면 샛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질지도 모르니 잘들 구경해라, 얘들아.
“우와! 은행잎이 엄청 노랗다. 그치? “
누구 하나 쳐다보는 이 없어도 흥을 돋워 말한다.
옆자리 큰아들은 자신의 일정을 읊어준다. 그 뒷자리 둘째 놈은 귀에 핸드폰 스피커를 꽂고 있다. “귀 터진다 이 녀석아! ” 그럼 늘 그렇듯 큰 소리로 자동차가 꽝꽝 울리도록 음악을 튼다. 요새 뭔 영어 이름으로 된 노래를 듣는다. 뭔지도 모르면서 좋단다. 대체 그 노래 제목과 가수가 누구냐. 응? 그저 좋단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듣는 음악이다. 그 느낌 아니까.
뒷뒷자리 꼬마 둘은 신났다. 노랑 은행잎은 뒷전이다. 그들의 전투를 치르고 있다. 요즘 끝말잇기의 끝판왕전을 매일 치르고 있다.
“사장님 ”
복실이의 공격이다.
“엄마 사장님 돼요? ”
달복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사장과 님을 띄울 것인가 붙일 것인가. 그것 참 고민 되네.
“엄마가 맞춤법 검사 때 매번 ‘님’ 자 띄우라고 표시되던데 띄우는 거 아닐까? “
“선생님도 안 띄우니까 사장님도 안 띄우는 거 아닐까? ”
똑똑한 중3 형아가 알려준다.
“그럼 엄마가 매번 맞춤법 검사에서 걸리는 건 왜 그렇지? 검색 좀 해봐. ”
빠르게 검색하는 아들 녀석.
보통명사 뒤에 님은 붙여쓰기, 고유명사 뒤에 님은 띄어쓰기란다.
이모님도? 고모님도? 누님, 형님. 어머님은 당연히! 꼬마들 신났다. 그들의 끝말잇기 세계에 ‘님’이 들어왔다.
아이들의 끝말잇기 규칙은 우리 때와는 사뭇 다르다. 좀 더 규칙이 많고 공격적이다. 검색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들은 매번 단어 활용이 늘어난다. ’름‘을 가지고 한동안 씨름을 하더니 요즘은 력(역) 공격을 한다. 슘, 륨, 늄이 들어가는 낱말을 외우느라 꼬마 둘이 고생한다.
한방 단어 사용은 금지다.
어제는 역력이 되냐 안 되냐로 논란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단어가 나올까.
달복이가 보내준 끝말잇기 단어 예시
차력
역도선수
수력
역기
기력
역삼역
역습
습격
격렬
열정
정렬
열기
기구
구름
름보
보름
름뱅이
이름
름황
황태자
자력
역발상
상상력
역발산
산화마그네슘
오늘은 드디어 유튜브 채널 이름은 되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 끝말잇기가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졌고 유튜브는 생긴 지 얼마 안 됐으니 너희들이 규칙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아. “
신기한 건 두음 법칙의 적용이다. 그건 한자만 적용된다고 한다. 구름과 이름, 보름 뒤에 오는 단어는 꼭 ‘름’으로 시작되어야 한단다.
방언의 사용도 항상 논란이다. 름으로 시작하는 단어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말들도 많아 북한어를 허용할 것인가도 늘 함께 거론된다.
심판은 늘 엄마인데 엄마가 미덥지 않으면 핸드폰에게 물어본다.
달복이는 복습을 철저히 한다. 복실이가 모를만한 원소기호가 결합된 단어를 섭렵한다. 그렇다고 질 복실이가 아니다. 모르는 낱말도 무조건 같은 음절을 붙여 공격한다.
그 공격은 매섭다. 목소리가 저절로 커진다. 싸움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걸 꼬마들도 아는 것일까? 그래서 앞 좌석의 형님들은 귀를 막고 싶은 걸까? 핸드폰 스피커로 귀를 막은 녀석 하나,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녀석 하나.
엄마 목소리는 들리냐?
“얘들아 은행잎이 참 노랗다! 예쁘지! “
우리의 출근길은 늘 그렇다.
때로는 잠자기 전까지 달복이와 복실이의 끝말잇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끝말잇기의 끝은 어디까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