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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Apr 22. 2024

무시하는 엄마

어릴 적 소풍은 솔밭, 해수욕장으로 갔었다. 과자, 음료수, 김밥을 바리바리 싸들고 모래밭, 풀밭에 둘러앉아 수건 돌리기를 하고 장기자랑 구경을 했다. 체육부장, 오락부장이 권력을 쥐는 날이었다. 소풍날이면 따라오는 떠돌이 장사꾼들이 요란한 장난감을 팔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허술한 물건들을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사고 싶었을까. 부모님이 주는 용돈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아이스크림 장수, 솜사탕 장수, 뽑기 장수도 소풍날은 한몫 챙기는 날이었다.


4학년 달복이가 소풍을 가기 하루 전 날. 요즘은 소풍이라고 안 하고 현장체험학습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지겹도록 배우는데 나가서 까지 학습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처지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아이들은 자연에서 뛰어놀기보다는 일정 건물, 장소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 온다. 점심 도시락은 필요없다. 김밥이 없는 소풍이라니 아쉽다. 용돈도 필요 없다고 한다. 물만 챙겨 오란다. 엄마는 소풍날 해 줄 것이 없다. 그러나 아이에게 현장체험학습 가는 날의 설렘은 엄마의 옛날 소풍날의 느낌과 같은가 보다. 다음날 못 일어나면 어쩌지? 비가 오면 어쩌지? 늘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곤 했는데 달복이도 똑같다. 자신은 늦으면 안 되니 꼭 6시에 깨워 달라고 한다. 아이는 평소 7시 30분에 일어난다. 그것도 일어나라고 사정사정을 해야 눈을 게슴츠레하고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서 졸면 어쩌려고! 7시에 깨워주마 하고 누웠다.




오빠가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는 소리를 들은 복실이가 끼어들었다.


나도 6시에 깨워줘.”


“오빠는 7시에 일어나는데 너도 그때 깨워줄게.”


”아니야, 나는 엄마랑 책 읽을 거니까 6시에 깨워줘. “


엄마는 가타부타 말을 않았다.


아이는 6시에 깨워도 못 일어날 것이 뻔하다. 평소 7시 30분에 일어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매일 비몽사몽이다. 당연히 못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달복이 오빠야는 7시에 일어나 가방과 물을 챙기고 말쑥하게 정돈된 모습을 하고 밥도 일찍 먹었다. 복실이는 7시 30분에 겨우 일어나 난리 난리 생 난리다. 자신을 왜 6시에 깨우지 않았느냐며. 엄마가 깨워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엄마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만, 너는 누구와 그런 약속을 한 것이냐.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는 밥 먹기를 거부한다.


화르륵


무시라니. 내가 아이의 말을 무시한 것일까. 못 일어날 것을 뻔히 알아서, 아이의 수면 시간을 위해, 너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깨우지 않은 것뿐인데 아이는 무시당했다고 했다. 엄마의 말없는 대답을 아이는 긍정으로 받아들였고 엄마는 무언의 대답으로 아이의 말을 무시했다. 아이 입에서 ‘무시’라는 말이 뱉어지고 나서야 ‘내가 아이를 무시했구나.’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라는 면죄부 같은 마음이 내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 백번 양보해 엄마가 말 끝을 흐려서 마지막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인정한다.




그날 오후 남편이 말했다. “복실이가 엄마랑 새벽에 책을 읽고 싶었대.” 유독 오빠의 소풍으로 들떠있는 엄마의 모습이 복실이에게 사랑을 갈구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용돈이 필요 없다는데도 굳이 오빠에게 용돈을 쥐여주주면서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엄마가 미웠을까. 자신도 관심 대상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맞다, 아이는 늘 엄마에게 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오빠를 안아주면 혼자 토라져서 삐치곤 한다. 공주병도 상 공주병이다. 내 팔자야. 질투와 시샘. 이것 또한 엄마가 뿌려놓은 씨앗이다. 꾸준히 “골고루 사랑”, “평등”을 만 천하에 알리자. 할 일이 참 많기도 하다.


며칠 뒤 아이가 또 새벽에 깨워달라고 하였다. 아이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 그날은 친절하게 6시 50분에 깨워주었다. 7시가 넘으면 새벽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복실이는 거실까지 이불을 끌고 나와서 엄마의 옆자리에서 같이 책을 봤다.


가끔 아이는 새벽에 깬다. 굴러가고 굴러가다 자신의 옆자리가 빈 것을 확인하면 깨버린다. 엄마의 빈자리를 확인하면 울음부터 터뜨리던 아기였는데 그래도  많이 컸다.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나간다. 이제는 울지 않고 조용히 나와 엄마를 뒤에서 안아준다. 졸린 눈을 비비면 이불을 가져와 옆자리 바닥에 깔아준다. 잠자는 시간에도 아직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아이. 그런 아이도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온몸으로 표현한다. 칭얼거림. 징징거림.


아이의 칭얼거림을 잘 체크하자. 유독 잠투정이 심했던 복실이는 오빠들보다 표현력이 뛰어난 것 같다.


언제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가 내 말을 끊을 때.



아이의 말을 끊지 말자.




사실 이전 화 ‘무시당하는 엄마’는 달복이의 현장체험학습 며칠 후의 일이다. 내가 아이를 무시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곱씹어 보면서도 내가 당한 무시가 더 커 보여 우선은 나의 억울함을 먼저 토로했다. 내가 당한 무시, 억울함, 경멸당함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나는 돌을 던진다. 던져진 돌은 작아 보인다. 그 돌을 맞는 타인에게는 커다란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돌이 배려라는 말로 둔갑이 되어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알았다.


대답 없음이 무시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 또한 이제는 안다. 아이를 믿어주자. 말 끝을 흐리지 말고 똑바르게 말하자.




반면 오빠들은 어떤가. 삼 형제는 늘 답이 없다. 꿈쩍도 않는다. 사춘기를 지나가고 있는 삼 형제는 엄마가 답이 없으면 한숨으로 답한다. 엄마가 말을 끊거나 소리를 치며 화답할 때면 제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 넷을 줄줄이 키우면서도 몰랐다. 아이들의 깊은 한숨 소리가가 내 무시에 대한 아이들의 답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채는 엄마다.  


무시당한 적은 많아도 내가 누구를 감히 무시할 거라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배려가 때로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시가 될 수도 있다. 지나친 배려는 믿음의 부재로부터 온다.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아이의 성장을 거부하는 데서 온다. 나와 타인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결과 상대를 낮잡아 보고 내 의견을 강요하게 된다. 아이는 나와 동등한 인간이다.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지 말자.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믿어주자. 4학년 달복이도 설레는 소풍날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날 수 있다. 2학년 복실이도 엄마와 책을 읽으려고 6시에 일어날 수 있다.





늘 이렇게 곱씹으며 생각하면 훌륭한 엄마가 될까? 어제는 첫째 복이의 옷을 두고 가벼운 말씨름을 했다. 추운데 반팔을 입고 가는 아이와 긴팔을 입으라는 엄마. 굳이 안 춥다는데, 굳이 여름 긴팔이 필요 없다는데도 저녁에 바람막이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내 마음이 편하고자 바람막이 두 벌을 주문했다. 필요 없는 것을 왜 사냐고 그런다. 작년 여름에 에어컨이 춥다고 매번 긴 팔을 챙겨 가던 게 생각나서 그랬다고 했다.


매번 한 두 수를 앞서 본다고 생각하는 부모. 연륜으로, 더 많아 보이는 경험으로 나는 아이를 억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내 마음이 편하고자 아이에게 불필요한 강요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뒤돌아서며 생각해 본다.


바람막이가 오면 복동이는 가방에 고이 접어 넣고 다닐 테다.  엄마와 실랑이하기 싫어서, 혹은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서. 우산이 그랬다. 비가 오든 안 오든 3단 우산도 가방에 늘 넣고 다니는 복동이. 아이의 가방은 늘 무겁다. 엄마의 마음이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하자. 복동이의 가방은 정말 무겁다. 가끔 제 가방 무게를 재본다. 11킬로그램.


아이는 늘 변하고 성장한다. 오늘의 아이가 어제의 아이가 아니고 미래의 아이도 아니다. 엄마의 고정된 시선으로 아이를 재단하지 말자.


아이의 말을 무조건 먼저 들어주자. 그리고 답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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