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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콩은 까맣다

나에게서 잊힌 기억들

by 눈항아리 Feb 22. 2025

갱년기 활력을 위해서 콩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마흔다섯의 나에게도 갱년기 신호가 왔다. 고심 끝에 콩을 주문했다.


렌틸콩과 검정콩을 샀다.


렌틸콩은 작고 얇다. 검정콩은 크고 뚱뚱하다. 첫날 렌틸콩과 검정콩을 불렸다. 한나절은 불려 밥 해 먹었다. 복실이는 콩이 싫다고 했다.  달복이도 밥을 반 이상 남겼다. 나는 어릴 때 심심하면 밥통을 열어 콩만 골라 먹었다. 엄마 몰래 먹었다. 나중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엄마는 알았을까, 몰랐을까? 콩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우리 딸은 콩이 싫단다. 우리 아들도 싫단다. 아이들은 렌틸콩밥만 해주기로 했다. 렌틸콩을 잡곡이랑 확 섞어 버렸다. 렌틸콩은 굳이 따로 불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연약한 콩이다. 밥을 푸면서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뭉개지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맞춤 콩이다.


검정콩을 불렸다. 다음날 따로 밥 하려고 반 주먹 씻어 통에 물을 부어 뚜껑을 닫아놨다. 고이 잘 모셔두었다. 밥 할 때 쌀을 다 씻은 후 콩을 한쪽에만 올리면 반은 콩밥, 반은 그냥 밥이 된다고 했다. 커다란 콩은 나 혼자 많이 먹어야지. 혼자 신났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그렇게 잊힌 또 하나의 기억은 색깔도 맞춤이다. 까만색이다.


까만 콩은 까맣게 잊으라고 까만 콩이 아닌데.


까만 물을 잔뜩 내뿜은 유리그릇 속 까만 콩은 두 밤이 지나고 발견되었다. 까만 물이 넘실 넘실 찰랑찰랑. 그 후로 까만 콩은 섣불리 물에 불릴 수 없었다.  맛있는 콩을 또 잊을까 봐서.


나중엔 불려서 눈앞에 고이 모셔두어야지. 그런데 왜 어디에 잘 두면 잊고야 마는지 그것이 의문이다. ‘고이 모셔두는 것’은 뭔가 비밀스러운 마법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머릿속이 까맣게 지워지는 것과 같은, 기억을 지우는 마법의 언어가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면 메모나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자.


나는 마법의 언어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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