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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May 06. 2024

슬픈 팔순

아버지 생신을 지나쳤다. 바쁘게 돌아치다 보니 날짜가 지났다. 그리 살가운 관계도 아니니 주말에 쉬는 날 가자 마음먹었다. 30분이면 갈 수 있는 친정집이지만 한번 가기가 참 힘들다.


죄송한 마음에 반팔 티 두 개를 샀다. 평생 아버지 옷을 사드린 적이 없다.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 옷을 샀다. 생신에 챙겨드리지는 못했지만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어버이날이 가까워 오니 꽃도 준비했다. 올해에는 작약 꽃 다섯 송이. 아담하지만 풍성하게 피어날 핑크빛 꽃이다. 꽃이 다 피어 버릴까 방에 들여다 놓고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지난해 용돈은 돈이 나오는 꽃바구니를 준비했었다. 무지 좋아하셨다. 돈 가지고 좀 장난스럽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길거리에 돈을 뿌려대는 것도 아니고 어르신의 기쁨을 위한 것이니 돈이라는 녀석도 이해하리라. 올해는 돈부채로 준비했다. 돈을 투명 봉투에 하나씩 넣고 찍찍이를 붙였다. 돈부채를 완성해 솔솔바람을 일으키니 돈이 술술 들어올 것 같다. 아버지에게 돈 바람이 불어오라고 부채도사에게 빌었다.


음식을 뭘 준비하실까 싶어 미리 포장 음식도 준비했다.


준비는 완벽했다.




팍팍한 삶이란 딸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똑같이 공평하다. 딸은 일하며 아이들 건사하느라 정신없이 산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농토에서 일하다 밤에 달을 보며 집에 오는 농사꾼이다.


평생을 가야 전화 한 통 없는 아버지, 힘들어도 기댈 수 없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나는 아파도 힘들어도 전화하기 힘든 딸이다. 서로에게 조금씩은 놓아버린 느슨한 관계라 생각했다. 그러나 놓아버릴 수 없는 아픈 관계.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지척에 살면서도 1년에 서너 번 얼굴 잠깐 보는 게 전부인 부녀 사이.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친정집에 가는 길은 익숙하고도 따뜻하다. 반가이 맞아주는 이 없어도 고향이란 그런 곳이다.


새벽일을 마치고 늦은 아침을 들러 집으로 온 아버지는 봄을 맞아 더 수척해 보인다. 머리는 허옇고 다리가 더 굽은 것 같다. 옷을 걸쳐 보고선 아침을 드신다. 원래 말수가 없는 분이지만 식사 후 돈부채를 펴보시곤 얼굴에 미소가 한번 걸렸다. 내 머리를 보고선 머리가 하얗다고 농도 하신다.


곧 비가 온다며 얼른 일어나 다시 일하러 가는 아버지를 먼저 보냈다. 농사일이 바빠 서로 얼굴 마주하기도 바쁜 봄날이다. 나도 아버지도 이해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서운하셨나 보다. 자신의 생일을 잊은 딸이 많이도 서운하셨나 보다. 팔순인 줄 몰랐던 딸이 많이도 서운해서 서둘러 일하러 나가셨나 보다.


내가 잊고 지나간 생신은 아버지가 태어난 지 여든 해 되는 날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팔순을 지나쳤다.
아버지 연세도 모르는 바보 딸.


나에게 화가 났다.

바쁜 일상에도 화가 났다.

챙겨주지 않는 가족에게도 화가 났다.

말해주지 않은 사람에게도 화가 났다.

전화도 하지 않은 나에게 또 화가 났다.

전화도 하지 않은 아버지에게도 화가 났다.

왜 나에게는 이런 허망한 일이 일어나는 걸까.


팔순잔칫날 새어머니의 자녀들이 챙겨주는 잔치를 마다하고 단출한 식사를 하고 바람을 쐬러 다녀오셨다고 한다. 안 보이던 유채 꽃밭에 나란히 서서 찍은 아버지 사진이 처량해 보였다.


새어머니에게 그 말을 듣고선 눈물 바람을 하고 돌아섰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 무심코 엄마가 잠들어 있는 납골당으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으로 혼자서 만나는 자리. 엉엉 울어도 괜찮은 곳이라 사람들이 많아도 좋다. 침울해도 좋은 곳이 있다니 참으로 위안이 되었다. 주저앉아 엄마의 기운을 느껴보려고 했다. 기운은 무슨 기댄 벽은 딱딱하고 바닥은 차다. 온기 하나 없는 이곳에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잠들어 있다.


잘못은 스스로 하고 엄마에게 무슨 한풀이를 하려고 그랬을까. 35년 동안 한 번도 혼자 찾지 않던 엄마를 찾았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답답함을 풀 곳이 없어서. 당신만 있었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나는 왜 겪고 사는 걸까.


잠시 앉아 속풀이가 될 것도 아니고 눈물이 마르지도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낮잠을 청하며 아픈 머리를 재생시켰다. 잠은 만병통치 약이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다. 그래서 나는 잠을 좋아하나 보다.




나는 은연 중 알고 있었다. 내 화는 부모의 부재로 부터 비롯된 것임을. 불안한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그래서 언젠가 엄마를 혼자 만나러 갈 것을 알았다. 숨기고 가두고 비워버린 내 마음속 슬픔과 원망들.


“아버지의 팔순을 잊은 건 엄마 때문이야! 엄마 때문이야!”


어디서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건지. 엄마탓이 웬말인가. 하지만 꼬인 매듭을 풀려면 엄마 부터 만나야 했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으니 차차 만나봐야겠다. 실컷 원망하고, 욕도 하고, 응석도 부리고, 투정도 하고 그리고 놓아 주어야 하는 걸 안다. 피하지 말고 만나보겠다.


내일은 아버지께 미안하다고 전화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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