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무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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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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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 같은 인생. 천박하고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한심한 인생에도 숭고한 부분이 있다. 상쾌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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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연해지려고 한다. 견디려고. 버티기 위해.
별일 아니다. 별거 아니다. 왜 견디려는지, 그건 진작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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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어나자마자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오전의 햇살과 다소 차갑지만 상쾌한 초겨울의 공기가 방 안에 가득 찬다. 자취방 치고 창문이 많은 그 집이 그는 썩 마음에 든다. 볶은 땅콩 한줌과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존 치버의 일기』를 읽으며 그 옛날 거장이라 불리던 작가 역시 자질구레한 생활의 문제에 평생을 시달렸음을 깨닫는다.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을 때 그는 위안을 느끼는가 자신의 고유한 심연을 침해당했다고 느끼는가. 그가 통증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때 서른 살이 목전에 닥친다. 이 상쾌하고 발랄한 아침에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해야만 하는 것들은 분명 있으나 그는 방향을 잃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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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고 당신을 탓하다 또 자신을 탓하고. 삶을 향했던 증오는 생명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길처럼 번지고. 그러나 빌어먹게 안전하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슬픔의 수압. 영혼에는 아가미가 생겨 익사는 차라리 불가능하고.
생명이 나에게 기생한다. 징그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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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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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기가 죽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게는 애초에 깡다구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호기를 부리기 시작한다. 그래, 나 실패했다. 어쩔래? 호기를 어떻게 부리냐고? 글 쓰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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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 가장 먼저 끊는 것은 치료다. 여기 한 가정이 있다. 열일곱 살의 소년은 학교에서 실시한 건강검진을 받는다. 의사는 청진기로 소년의 심장박동을 체크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의사는 소년에게 심장박동을 직접 들어보라고 청진기를 건네준다. “심장에서 잡소리가 들리죠? 어릴 때 이런 게 나다가 자라면서 사라지는데 아직 들리네.” 의사는 소년의 자그마한 몸집을 보고는 아직 발육이 늦어서 그런 걸 수도 있으니 내년에 다시 검진을 받아보라고 한다. 소년은 청진기로 들은 심장의 버석거리는 듯한 소리를 오래 기억한다. 훗날 성인이 되어서도 그는 이따금 자신의 심장이 버석거리며 뛰는 느낌을 받지만 다시 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는다. 소년의 형은 대학생 때 무릎의 인대를 다쳤다. 무릎을 접으려 들 때 다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고는 병원을 찾는다. 시티 사진을 찍었지만 인대의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다고 의사는 말한다. 반깁스를 한 상태로 한 달간 물리치료와 소염제를 병행한 그는 그러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의사는 아직까지 그러면 더 큰 병원으로 옮겨 엠알아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사진이라는 얘기에 그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뒤 병원을 다시 찾지 않는다. 일 년 넘게 무릎보호대를 차고 혼자서 스트레칭으로 재활을 한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일 년을 보낸 그는 어느 날 무릎을 접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한다. 이후로 무리하게 걷거나 서 있던 날, 혹은 겨울에 야외활동을 하면 무릎 뒤쪽 인대가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기지만 다시 병원을 찾지는 않는다. 그들의 어머니는 수년 전 오른쪽 눈 밑에 커다란 다래끼가 생겼다. 이전에도 몇 번씩 다래끼가 났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곤 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다래끼는 점점 더 커지고 낫지 않아 결국 안과를 찾는다. 소염제와 항생제를 처방받고 의사의 권유로 온찜질 팩을 사서 매일 찜질도 했으나 차도는 없다. 보름이 지나도록 낫지 않자 의사는 염증이 피부 아래서 딱딱하게 굳었을 수도 있으니 수술로 긁어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 뒤로 그 역시 더 이상 병원을 찾지 않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환부는 점차 가라앉았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눈밑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보면 딱딱하게 굳은 다래끼가 만져진다. 간혹, 그러니까 일 년에 한두 번쯤 누군가가 그의 다래끼를 알아볼 때면 그는 묘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그의 남편은 어느 날 자기 혀 밑에 자그마한 물집이 잡힌 것을 발견한다. 자연스레 사라지길 바라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혀 밑의 이물감은 여전하다. 어떤 날은 이에 긁혀 물집이 터졌는지 짜고 비린 맛이 난다. 그리고는 금세 다시 물집이 잡힌다. 어떡할지 모르지만 병원에 가지 못한 채 두어 달이 지난다. 두 달째 생겼다가 잠깐 사라지고 금세 다시 생기던 물집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지고 더 이상 나지 않는다. 그저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들이 모두 모인 저녁 식탁을 상상해 보자. 그들에게 가난이란 자라면서 사라져야 할 심장의 잡소리 같은 것이기를 바라나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에게 안부란 손상된 인대의 극심한 통증과 같다. 그들에게 전망이란 딱딱하게 경화되어 긁어내야만 하는 고름이며, 대화란 혀 아래 물집처럼 이물감만 드는 것이다. 그들을 아는 모든 이들이 그들의 식탁에 기도와 축복을 전하지만, 기적을 기대하는 이는 없다. 행운이 있다면, 기적이 있다면 그들의 몸에 깃들기를 그들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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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라는 것을 도통 하지 않는 순간의 뇌를 떠올리면, 딱딱하게 굳은 고름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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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립출판 작가다. 책을 만들 때는 언제나 돈값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독자들이 내 책을 산다. 돈을 지불한다. 그럼 책을 읽고 적어도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기본이다. 글을 쓸 때도 퇴고할 때는 독자를 유념한다. 초고는 아니다. 시작할 때부터 독자를 유념하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하지만 책으로 내기 위한 퇴고 마무리 단계에서는 이 글을 읽을 독자를 유념해야 한다. 모든 글은 자기만족을 위해 쓰인다고 믿지만, 오로지 자기만족만을 위해 쓰는 글은 작품이 아니라 일기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은 책임감이 있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소수는 독자의 눈치를 본다느니 타협을 한다느니 대중을 신경 쓴다느니 떠들기도 한다. 그렇게 떠드는 게 작가들이라면 솔직히 조금 웃긴다. 댁들은 독자를 유념하면 줏대 있게 글을 못 쓰나 보지?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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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강한 어조의 글을 쓸 때는 경계해야 한다. 타격감에만 미친 글은 악플 같은 비난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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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런데 돈값을 안 해도 된다. 무료니까. 무료 연재니까. 돈을 안 받아도 소설이면 열심히 쓴다. 지금 연재하는 소설처럼. 그런데 이 글은 작품이 아니다. 그냥 단상이다. 일기고 에세이고 엽편이고 헛소리다. 부담 없이 쓴다. 독립출판을 하면서 내 책을 홍보하는 일은, 성공적이었을 때나 홍보다. 실패하면 종일 주변에 구걸했다는 기분이다. 치욕스럽고 비참하다. 그러나 작가는 돈이 필요하다. 만약 이 글이 마음에 든다면 내게 조금의 돈을 보내줘도 좋겠다. 사양하지 않겠다. 돈을 보내주지 않아도 좋다. 그래도 이 글의 퀄리티는 내내 이 정도는 나올 것이다. 누군가가 조금의 비용을 지불한다면 그게 나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애호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