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무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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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대할 때 튀어나오는 나의 기질이 싫다. 업신여김과 빈정거림, 조롱, 냉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최대한 애쓴다. 하지만 내 내면의 표정이 어떤지 적어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런 내 기질을 싫어한다. 잘난 것 하나 없이 남들을 하찮게 보는 기질은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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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대하는 내 모습은 전혀 다르다. 어릴 적부터 내가 거리낌 없이 끌어안았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작품이었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연극이든 뭐든 간에, 어떤 작품을 처음 접하는 순간에 이미 나는 그것을 좋아할 작정으로 접한다. 호의를 가지고 환대하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작품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려는 태도로, 기꺼이 칭송하고 찬양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이러한 태도가 자칫 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리라는 우려는 없다. 취향에 맞지 않아도 훌륭한 작품은 음미한다. 좋지 않은 작품, 수준 떨어지고 엉망인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게 비판적이다. 용납도 용서도 못 한다. 좋아할 작정으로 다가갔으나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작품은 배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장하게 지른 농담에 빗장 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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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나게 훌륭한 작품을 읽으면 멍하다. 그리고 이걸 쓴 작가가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작품을 쓴 작가여, 죽어라. 좋은 작품은 작가의 날숨에 부식되기 쉽다. 숨 쉬지 마라. 죽어라. 그러지 않을 것이라면, 기어코 살고자 할 거라면 잘 살자. 작가의 어리석은 품행으로 작품에 오물을 끼얹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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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하게 쿨한 것보다 따뜻한 너그러움이 더 강하고 아름답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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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라는 말에 무게를 느낀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찰나의 감각에 가깝다는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 같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팩트는 대부분 개별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통계를 내고 보편성을 끌어내어 가능한 한 넓은 범위의 범주화를 이룩한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넓은 범주 바깥에 놓인 사례들이다. 거기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보편성을 끌어내는 일.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며, 모든 문학이 크게든 작게든 저마다의 투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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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연처럼 무르고 무딘 성정. 내 손 닿는 대로 내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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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을 쓸 때 내 생각을 쓴다기보다 내가 만들어낸 등장인물의 생각을 적는다고 말하는 게 더 적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소설에서 작가님이 얘기하고자 하신 바는 이런 거죠?” 라고 물을 때면 난감하다. 내 생각과 등장인물의 생각, 소설에서 독자가 읽어낸 의미는 모두 다르니까.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유령을 실재하게 하는 무당 같은 존재다. 내가 만들어낸 유령을 독자들이 실재하는 목소리라고 믿게끔 대신 이야기를 전해주는 창구 같은 존재. 그래서 접신하듯 쓴 초고에는 냉철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퇴고가 잇따라야 한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1818년판 서문은 그의 남편인 퍼시 비시 셸리가 대신 썼는데―시대를 감안했을 때 출판사의 부당한 요구 탓이었을 가능성이 높다―퍼시는 작가의 이름을 대신하여 작가에게 쏟아질 관심에 안전장치를 걸어 놓는다. “등장인물과 주인공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견해들이 나의 평소 신념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오해받는 일은 전혀 없었으면 한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창작 방지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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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소설 『선셋 리미티드』를 두고 워싱턴 포스트는 이런 찬사를 바쳤다. “매카시는 그가 존경하는 다른 작가들―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처럼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깊고 굉장한 작품들을 쓰고 있다. 이런 작가들은 자진해서 신과 싸움을 벌인다.” 탐나는 찬사다. 신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시를 쓸 적부터 간직해온 내 오랜 테마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의 존재가 내 안에서 옅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미 완전히 사라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