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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씨를 만난 날

by 고운로 그 아이


6월 햇살 따사롭고 은혜롭던 날

내 안의 은둔자 학씨를 만났어요

내 차가 동하다가 주차 중이던 suv 차량의 범퍼에 살짝 닿는 순간

학씨가 불쑥 튀어나왔어요

"아니 이토록 억울할 수가! 이렇게 살짝 닿았는데 말이야, 게다가 외제차를"

세상 무너질 듯한 절망의 언어가

학씨의 입에서 선껌처럼 부풀어 올랐어요

"그동안 수많은 차가 내 차를 긁고 지나갔어도

나는 따진 적이 없었다고"

한숨으로 땅이 푹 꺼지고

학씨는 점점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갔어요



벚나무 끝에 앉은 참새는 로롱조로롱

안타까워 재잘거리고

백미러에 붙어 있던 거미는

안절부절못하다 번지점프를 했어요

열아홉 살 내 차, 눈이 침침하여 깜빡깜빡

가려운 흉터만 흘깃거리고

억울한 학씨는 동굴 속으로 또 들어갔지요



지켜보고 있던 양심이 움직였어요

육각 연필을 힘껏 쥐고

메모장에 꾹꾹 눌러 써내려 갔어요

'귀하의 차량에 제 차가 닿은 것 같습니다.

차량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시고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고이 접어 귀퉁이에 꽂아 놓았습니다



학씨, 깃털이 날아와 부딪쳐도 그건 접촉인 거예요

깃털 같은 죄도 안고 있으면 무거워지지요



양심은 하늘을 보았습니다.

용서받고 가벼워진 많은 깃털들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학씨 -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부상길 캐릭터가 화날 때마다 내뱉는 상스러운 말.

이 캐릭터의 별명이 되었다.



지난 주말, 주차된 차를 후진시키고 좌회전을 하는 과정에서 바로 옆에 있던 suv 차량의 범퍼와 살짝 닿았다. 받은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닿은 것이다.


그 차는 ㅍ사의 외제차, 하늘이 깜깜했다. 닿은 것이라고 해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요구를 한다 해도 사실 할말은 없는 상황이다. 내 과실이기에.


내려가서 자세히 볼 용기는 없고 곁눈질을 해 보니 먼지가 많이 묻어 있고 흰 분필 같은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내가 낸 것도 그중에 있을지도 모르고 아닐 수도 있었다.


화가 났다. 왜냐면 19년 된 내 차에는 누가 긁고 지나갔을지 모르는 흠집이 수도 없이 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의 차를 이렇게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가슴을 졸이는데, 내 차의 상처는 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주었을까. 사물이라기보다는 인격에 가까운 내 차에게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과연 차주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선처해 줄 것인가, 범퍼를 통째로 갈 것인가. 보험으로 처리한다고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켰을 때 결론은 하나, 접촉이 맞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성껏 메모를 써서 꽂아 두었다.


반나절쯤 지났을 때 문자가 왔다.



외제차는 상대적으로 고가이기에 엄격한 분들도 있다. 물론 자신의 물건을 지키는 이런 태도는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관용을 베풀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놀랐을 것을 알고 안심시키는 배려의 마음까지 받았다.


하루동안 해프닝을 겪으며 선량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신중한 행동,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 관용을 베푸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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