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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장 반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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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 Sep 23. 2024

신 데렐라

[한 장 반]프로젝트16

By 한작 


“사람 맞으시죠?”


회영이 실수로 숟가락을 건드리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여자가 눈을 한번 내리깔았다 올려보며 물었다. 수도 없이 겪었지만 이런 우아한척 하면서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희는 VIP전용 식당으로 주방부터 서버까지 안드로이드가 서비스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마음 속에선 불길이 치솟았지만 회영은 매뉴얼대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신입 시절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자, 선배는 옛날 애니메이션에 나온 명대사라며 ‘그냥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라고 알려줬다. 도움이 되는 말이긴 했지만 이 선배라는 인간도 전체적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붉은색 접시에 담긴 음식을 나를 때면 “3배 더 빠르다!”라고 외치며 달려 나갔고, 5명이 예약을 하면 그 가운데 반드시 한 명은 쓰레기가 있다며 중얼거렸다.


어딘가 나사가 풀린 것 같은 직장 동료와 까탈스러운 손님들을 상대하다보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NIT를 100% 받으려면 주당 20시간은 반드시 일을 해야 했다. 주당 10시간의 일을 하면 70%, 하지 않으면 50%만 지급되었다. 어차피 줄 NIT를 왜 꼭 일을 해야 주는 지도 모르겠고, 안드로이드가 모든 걸 다 해주는 세상에서 굳이 사람이 뭘 해주길 바라는 부자들 마음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회영의 유일한 낙은 친구들과 클럽에서 술에 취해 춤추는 게 전부였다. 가식적인 웃음을 짓고 친절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수모를 당하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속물로 보일까봐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못했지만 클럽에 온 부자를 만나 팔자 한번 확 펴보겠다는 꿈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진상을 만난 날은 클럽이 더 끌렸다.


클럽 ‘노이슈반슈타인’은 오늘도 북적거렸다. 강남 한복판이라는 위치와 차별화된 입장객 관리는 아무나 갈 수 없는 클럽이라는 이미지까지 덧붙여지면서 가혹할 수준의 가격을 자랑했다. 부담스러움을 넘어 클럽 푸어가 될 지경이었지만 회영은 ‘노이슈반슈타인’만을 고집했다. 


옷을 빌리며 회영은 오늘은 꼭 좋은 인연을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새로 오픈한 드레스 렌탈샵 ‘엘프’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의상 대여실이었다. 하루 단위로 계산되는 합리적인 비용과 클럽과 파티 의상 전문이라 회영에겐 최고의 선택지였다. 고민은 자정을 기준으로 더해지는 가격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회영은 하루 렌탈을 선택했다. 주말도 아닌 화요일에 12시 넘게 놀 마음도 없었고 비용도 신경 쓰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클럽에 들어서자 귀청을 울리는 음악과 함께 시선이 쏠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발끝이 간질거리는 짜릿함! 이거였다. 이 맛에 클럽을 끊을 수 없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클럽을 돌며 시선을 만끽하는 사이 말끔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일행 있으세요?”


차밍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가지런한 하얀 이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회영은 수줍은 듯 살짝 웃어 보이며 남자를 살폈다. 시계, 구두, 셔츠가 하나같이 번쩍거렸고, 지루하고 내용 없는 문장과 달리 사용하는 단어는 고급스러웠다. 말끔하게 입었지만 천박한 단어만 딱딱 골라 사용하는 싸구려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재미없는 타입 같았지만 이 남자야 말로 자기가 그리던 왕자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회영은 지루함을 참으며 왕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지루한 말투만큼 속도도 느려서 별다른 소득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연락처를 주고받거나, 지금 당장 나가서 어디든 들어가야 할 시간인데 계속 자기 말만 하는 왕자를 보고 있자니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때 회영의 드레스 안 쪽에서 노란 불빛이 들어왔다. 렌탈 시간이 거의 다 됐다는 걸 알리는 불빛이었다.


렌탈샵 ‘엘프’는 지독한 업체였다. 예약한 시간이 넘길 경우 추가 요금은 당연했고 채권 추심 업체처럼 가혹하게 의상을 회수하기로 유명했다. GPS 추적기로 곧 회수팀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회영은 왕자의 말을 끊고 서둘러 클럽을 나섰다. 의아한 표정의 왕자가 손을 잡고 실랑이를 벌인 탓에 시간이 더 지체됐다. 클럽 문을 나섰을 때 불빛은 빨간색으로 깜박거렸다. 이미 시간이 넘겼다는 표시였다. 


강남 클럽 정문 앞에서 회영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에게 둘러쌓였다. 남자들은 인정사정없이 회영의 옷과 구두, 귀걸이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저항해 봤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길거리 한복판이라는 것보다 간신히 만난 백마 탄 왕자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게 더 굴욕적이었다. 그리고 그 왕자가 자신을 보는 눈빛을 견딜 수 없었다. 오늘 낮에 본 바로 그 눈빛. 자신에게 사람이냐고 묻던 여자가 짓던 그 표정. 거만함과 경멸이 섞인 눈빛으로 왕자가 말했다.


“너 클럽 오려고 옷 빌려 입은 거야?”


머리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회영은 벗겨진 구두를 들고 히죽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래, 이 개새끼야. 옷 좀 빌렸다! 그래서 왜? 거지년이 사람 행세해서 웃기냐!”


악다구니를 뱉어 내며 구두 뒷굽으로 몇 번 더 내려치는데 뭔가 이상했다. 얼굴을 감싸 쥔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회영은 구두를 내던지고 어둠 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서로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았으니 쉽게 찾지 못할 거라고 마음을 다독였지만 현실은 회영의 바람과 달랐다. 다음날 가장 많이 본 뉴스 1위는 자신이 벌인 클럽 사건이었고, 범행에 쓰인 증거라며 구두 사진이 메인에 걸려있었다.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병실에 누워있는 남자 사진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댓글엔 벌써 회영의 신상이 노출되고 있었다. 


회영은 현실을 받아드렸다. 그리고 길고 긴 반성의 글과 함께 자신이 느낀 모멸과 절망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적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적은 글은 다행히 동정을 불러왔지만 폭행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전치 8주의 부상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회영은 합의금으로 꼬박 일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물어야 했다.


모두에게 불행한 사고였지만 그 사이 드레스 렌탈 ‘엘프’는 나날이 성장해 나갔다. 인생 2막에서 창업에 성공한 여성 CEO는 직원들 사이에서 대모로 통한다는 훈훈한 인터뷰는 큰 관심을 끌었고, 대모의 마음가짐이라며 명언 몇 가지를 끼워 맞춘 에세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모가 닮고 싶은 여성 1위에 오르며 영광을 누리는 사이 이상하리만치 누구도 드레스 렌탈 ‘엘프’의 가혹한 추징 시스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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