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해야 할 1980년
1980년경 술 한잔 걸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공부하는 아들, 딸을 향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니는 공부만 열심히 해라. 아부지가 딸라빚을 내서라도 뒷바라지 할테니...”
그 시절, 지금의 아버지처럼 부드럽고 정겹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무덤덤한 그 한마디는 자식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던 그런 아버지의 헌신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우리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교과서 대신 소설책, 무협지를 펴고 공부하는 시늉을 했고, 책값 삥땅쳐서 오락실에 갖다바치거나 좀 성숙했던 아이들은 술집으로 갖다바치는 등 공부보다는 그 시절의 유흥과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물론 철이 덜 들었던 우리들의 일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 우리의 아버지들은 왜 딸러빚을 말했을까요? 은행빚도 있고, 사채도 있고, 빚을 이름하는 수많은 단어들을 대신해서 말입니다. 이유는 당시 달러의 금리가 사채 수준만큼이나 높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돈을 빌리면 대략 25% 이상의 이자를 물어야 했습니다. 시장에 풀린 달러를 걷어들이고,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 연준이 기준 금리를 21.5%로 올려버렸기 때문입니다. 0.5%의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면 빅컷이라 부르는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리입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딸라빚'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딸라빚이라는 이름 뒤에는 어렵던 시절, 빚의 힘듦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리사랑이 여전하지만 점점 더 그 힘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일인가족이라는 말도 안되는 신조어가 힘을 받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에게 부여된 자연스러운 자식사랑이 이제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고,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주 부자연스럽게도 말입니다.
1979년과 1980년, 달러가 너무 많이 풀려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자 금리를 올려서 달러의 가치를 높였던 미국의 연준, 연준의 소유주인 미국의 은행들은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의 최고수입니다. 금리 조절, 달러 유통량 조절을 통해서 늘 쉽게 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낮은 금리의 대출로 달러를 풀고, 높은 금리의 상환으로 달러를 걷어들이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쉽게 돈을 벌었습니다. 도저히 못갚을 상황을 만들어 담보를 싸게 취하는 과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남의 나라 화폐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여 자국의 이익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월가는 금융자본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벼락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투자했던 우리는 대부분 채무자가 되었고, 미국의 월가는 채권자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진 이유입니다. 시중 은행의 80% 이상이 월가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자유, 돈이 돈을 버는 파이프 라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진리가 되어 우리들의 탐욕은 커지기만 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며 자식에 대한 무한 애정을 발휘하는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은 외면받게 되었습니다. 가족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한국인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돈에 대한 애정과 노력이 그렇게 커졌음에도 대부분이 더 가난해질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뒤로 돌려 1980년에 맞춘 이유는 50대인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오래된 미래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위한 130여개의 씬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하나씩 선보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