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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by 할수있다

세상이 여전히 불안합니다. 경제는 점점 바닥으로 기어들어가고, 러우전쟁의 양상은 점점 더 확대되어 3차 세계대전으로 향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현상은 이해하기 힘든 터라 그저 불안한 마음이 커질 수 밖에 없는 시기입니다. 크게는 보수와 진보, 친러와 친미. 친일과 친중으로 나뉜 호사가들의 말들을 들으며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이 추운 엄동설한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란 모두 먹고사니즘에 가까이 있습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것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서 분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지만 대부분의 행동 양식이나 갈등의 양식이 먹고사는 문제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다 잘먹고 잘살면 좋을텐데 그러지 못한 세상은 참 아쉽습니다. 많이 배운 자, 그렇지 못한 자, 영리한 자,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하고 능력을 기준으로 남의 삶을 자신의 잣대로 구분하는 세상은 얼핏 공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망할 잣대는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고, 많이 가져가는 누군가의 구차한 변명에 가깝습니다.


왜 그런지 한 번 볼까요. 가족의 의미가 많이 희석되고 있지만 그 가족 구성원들의 능력 차이는 서로가 뺏고 뺏기는 경쟁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의 관계를 가집니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이가 다툼이 되기보다는 서로 돕는 경향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권력다툼의 왕족의 혈투나 막대한 재산을 놓고 벌이는 재벌가의 암투는 그런 경향과 반대이지만 보통 우리들의 삶은 그러합니다. 먹고 먹히는 자연계 포식관계의 선정성처럼 왕족과 재벌가의 경쟁은 선정성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흥미를 끌지만 우리들의 보편적인 삶과는 결이 다릅니다. 우리들에게 가족이란 개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쟁보다는 협력이 앞서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족 공동체는 친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 민족 공동체, 국가 공동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공동체는 경쟁 관계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이 강한 구조였습니다. 어느 순간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옅어졌지만 말입니다. 근대화, 산업화가 진행되어온 지구의 시간들을 돌아보면 서로 돕는 감수성은 뒤로 하고 오직 경쟁만이 강조되었습니다. 경쟁의 효율이 없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경쟁에 뒤진 패자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도, 승자의 아량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우리들의 삶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중세 농업사회에 비해 수요가 중요해졌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더라도 수요가 부족하면 공급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제품을 소비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잘만들어도 팔지못하고 돈을 벌 수도 없습니다. 팔고 사는 시장의 경제활동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 적절하게 이어져야 하는 것이 산업사회가 농업사회와 다른 점입니다. 워렌 버핏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가 소비하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혼자 수천대의 자동차를 소비하고, 수만대의 TV를 구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 산업사회에서 추앙을 받고 있지만 산업사회에 꼭 필요한 수요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고, 수요 창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는 수천억을 벌고, 누구는 수천원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세상은 공정과 불공정의 문제를 떠나 자연스러운 자연의 법칙이 아닙니다. 경제적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기준이자 법칙일 뿐입니다. 자연의 법칙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규칙이니까요. 산업사회의 생산과 소비는 바다에서 수증기,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강을 거쳐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대자연의 구조처럼 자연스러운 순환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산업사회는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 먹고사니즘이 해결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거창한 경제 철학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던 인간의 축적된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친 자연계 맹수들로부터 인간을 지켜왔던 공동체의 누적된 경험, 그런 지혜말입니다. 세상이 영화처럼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무탈하고 평범한 우리들의 삶은 먹고사니즘의 문제만 어렵지 않다면 흘러가는 강처럼 평이합니다. 자극적이거나 흥미롭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무료함을 사건을 통해 갈등과 긴장, 자극으로 흥미를 주는 것이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의 자극이 점점 더 과도해지고 있다는 것은 저만이 착각일까요. 일확천금의 꿈, 과도한 환타지, 실제와는 너무 큰 괴리감으로 자극과 선정성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관객의 관심을 위한 과한 자극과 선정성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은 부자연의 극치라고 해도 좋을 상황입니다. 그런 부자연스러움에 어쩌면 우리 모두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속가능의 평화가 아닌 전쟁, 협력보다는 경쟁과 분열, 화합보다는 갈등으로 세대 갈등, 남녀갈등이 이상하게도 점점 더 노골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2024년, 우리는 그것들의 부자연스러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맞지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데 갈등과 분열을 자연스러운 것인양 적응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혼자 불안한 미래를 고민하며 말입니다.


자극과 선정성, 관심을 끌 소재를 거부하면서 자연스러움의 재미없음으로 상업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객기에 가깝습니다. 자극이 약한 소재로는 고객의 관심을 끄는 마케팅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움이 넘쳐나는 세상, 모두에게 익숙한 자연스러움의 내러티브는 그 나름의 차이로 우리들의 삶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관점을 보일 수 있을 꺼라 생각합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삶, 힘들지만 아직 지쳐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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