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한 챕터 읽기
앞서 밝혔든 나는 꽤나 리스트 만들기를 좋아한다. 다할 것도 아니면서 적는 것만으로 재미와 만족감을 느낀달까. 리스트를 적으며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미 하고 있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돌아보면 내 사소한 습관 곳곳에 '성취감'을 떨어뜨릴 이유들이 꽤나 많았다.
그래서 이번 '실패 불가능한'성취리스트의 한 가지 계획이자 이번 에피소드의 주제는 더도덜도 말고 '사피엔스 한 챕터 읽기'다.
새해가 밝으면 의식처럼 하던 일중 하나는 올해에 읽고 싶은 책의 제목을 적어 내려 가는 것이다. 어느 해는 100권 읽기라는 목표를 세웠고, 결과는 물론 대실패였다. 빼곡한 목표와 계획들 사이에서 어쩌면 예상했던 실패들이 소리 없이 쌓여갔다. 나는 어쩌면 실패를 계획했던 건지도 모른다. 과연 책 100권 읽기 뿐일까? 다이어트 성공하기, 포토샵 배우기까지, 구체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이 하지 않을 것까지 다 적고 보는 나의 폐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해에는 현실적인 목표로 10권 읽기로 대폭 줄였었다. 덕분에 올해는 연말이 되기 전에 드디어 목표를 완주했고, 완주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치트키는 바로 '사피엔스 한 챕터 읽기'라는 아주 단순한 계획 덕분이었다. 무기력할 때에는 책 한 권 완독은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한 챕터는 짧게는 2-3페이지에서 길어봐야 10여 장이니 실패할 수 없지 않겠나.
숙제처럼 남아있는 한 권이자 바로 벽돌책으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다. 특별히 사피엔스를 읽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일상이나 뉴스에 등장하는 갈등 속에서 다른 생명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인간의 생명을 당연시할 때면, 과연 인간의 존재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가 맞을까?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이나 길고양이의 생명보다 인간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의문과 이런 생각을 품는 내가 괴짜인 걸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식인의 통찰을 빌어 답을 얻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매일 한 챕터 읽기는 나름 순조로웠다. 한 챕터씩 쪼개서 언제 다 읽지 싶기도 하고, 몰입해서 읽어야 하려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계획대로 자기 전에 딱 한 챕터씩만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며칠이 되고 일주일이 넘어가자 잠들기 전에 한 챕터씩 읽는 게 그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고백하자면, 어느 날은 몇 챕터를 계속해서 읽다가 밤새 새벽이 되도록 잠 못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읽다가 조금 지루한 내용이 나오면 읽다가 잠이 들기도 했는데, 한 챕터만 다 읽었다면 자연스럽게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첫날은 너무 재밌어서 꽤 읽었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의 전체 내용이 흥미로울리 없고, 책장이 금방금방 넘어갈 리도 없었다. 그래서 일반 에세이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아무 때나 펼쳐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잠들기 전엔 꼭 습관처럼 책장을 펼쳐 한 챕터씩을 읽었고 이러다 다 못 읽고 멈추는 거 아닌가 싶을 무렵, 어느새 사피엔스의 1/2을 넘기고 있었다.
600페이지의 벽돌책을 자랑하는 사피엔스도 한 챕터는 별게 아니었다. 다 읽는 데까지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렸지만, 그만큼 머릿속에 남은 게 많기도 하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 빠르게 읽어 내려간 책들은 재밌게 봤으면서도 내용이 상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피엔스는 역사와 함께 '작가의 관점'을 가지고 뚝심 있게 써 내려간 탓인지 아직도 곱씹어 볼 만한 내용들이 생각이 난다. 인간이 이동하는 경로에 따라 대형동물이 멸종했다는 사실과,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간의 식단이 더욱 빈약해졌다는 사실에 충격과 함께 강한 발톱도 이도 없는 인간이 가진 특유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다.
처음 사피엔스를 읽고 싶었던 이유는 위의 내가 가졌던 의문 때문이었고, 그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명확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다른 생명보다 인간을 우선하는 건 신의 뜻이나 자연의 질서 즉 객관적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생존 본능도 있지만, 생존의 위협이 없을 때에도 그 심리가 작동하는 건 '농업혁명' 이후 가축이 된 동물에 대한 인식과 '인본주의' 사상의 등장으로 그 무엇보다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기로 합의한 인간들 사이의 약속 때문인 걸로 보였다. 인간이 가장 고등생물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생명의 가치나 고통이 덜 중요한 건 아니라는데 공감했다. 책장의 끝에서 나는 생명의 소중함이나 사랑은 종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나만의 결론에 닿아있었다.
사피엔스 간단 요약: 사피엔스는 인간이 언어와 상상력, 협동으로 지구상 가장 치명적인 종이 된 과정을 보여줬다. 특히 농업혁명이 인간과 동물 모두의 삶을 악화시켰다는 시각이 새로웠다. 책은 인간이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없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사피엔스를 읽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기보다 좀 더 공고해진 느낌이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인간의 도움을 통해서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생명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공존을 위한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위선자라며 돌을 던지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오고 있다고 믿는다.
매년 관성처럼 적는 새해목표가 있는 사람은 나 말고도 수없이 많을걸 안다. 늘 '읽고싶은 책 목록'에만 있는 책이 있다면 우선 '(책 이름) 한 챕터 읽기'를 계획하고, 매일매일 해보는 걸 추천한다. 매일매일의 성취감이 쌓여가는 걸 느끼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성취 리스트 10/22
[ 매일 하는 것들 ]
☑ 1. 기상 직후 이부자리 정리하기
☑ 2. 물 한 잔, 약 먹기, 다시 눕지 않기
☐ 3. 자기 전 5분 폼롤러 마사지
[ 하루에 한 개씩 ]
☑ 4. 화장실 줄눈 곰팡이 청소하기
☑ 5. 안 입는 옷 5개 버리기
☐ 6. 옷장 청소하고 제습제 교체하기
☐ 7. 살 빼면 입고 싶은 옷 걸어두기
☐ 8. 콩이 건강검진 하기
☐ 9. 콩이랑 5분간 사냥놀이하고 사진 찍기
☐ 10. 콩이 새 숨숨집 만들어주기
☑ 11. 조카들 크리스마스 선물 고르기
☐ 12. 몸 일으켜 헬스장 가기
☐ 13. 한강 따라 30분간 자전거 타기
☑ 14. 5분 멍 때리기
☑ 15. 1시간 예능 보며 깔깔거리기
☐ 16. 조조영화 1편 보기
☐ 17. 맛있는 커피집에서 커피 마시기
☑ 18. 장태산에서 단풍 사진 찍기
☑ 19. 사피엔스 한 챕터 읽기
☑ 20. 30분 집중해서 글쓰기
[ 도전 과제 ]
☐ 21. 8시 이후 금식 3일 연속 성공하기
☐ 22. 1시 반 이전 취침 3일 연속 성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