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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Jun 13. 2024

나는 쉬운 여자다

그렇다고 나를 쉽게 대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연재 요일을 월요일과 목요일으로 변경했습니다. 앞으로 정말 성실히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한 옷들이 배송됐다. 착용을 해봤는데 예상했던 대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나의 새 옷을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짧은 거 입고 다니면 남자들한테 싸보여.", "나이에 좀 맞게 입고 다녀." 죄송하지만 나는 그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어느 날은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남자에게 절대 말할 필요 없는 다섯 가지'라는 제목의 영상이 보였다. 유튜버는 여자가 남자에게 이 다섯 가지 멘트는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일렀다. 첫 번째, 지인 뒷담화. 두 번째, 특정 병력. 세 번째, 과거 경험. 네 번째, 재정 상태. 다섯 번째, 신체적 콤플렉스……. 맙소사, 내가 진작 다 떠벌려놓은 것들이었다. 


유튜버는 남자친구에게 지인의 뒷담화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뒷담을 하는 나도 같은 부류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해선 의문을 가졌다.  회사 등의 집단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소속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앞담도 못하는 처지에 뒷담까지 못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유튜버는 여성의 질환인 질염 등 특정 병력을 남자들에게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남자들에게 성관계 횟수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우울증, 조울증, 수면장애 등 감정 관련 병력도 이야기해선 안 된다고 했다. 실수를 하거나 다투게 될 때 남자가 색안경을 끼게 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나 또한 가족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자친구가 생기더라도 우울증, 불안장애 등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나중에 나만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거였다. 


나는 특히 이 부분에 대해 크게 반대한다. 그리고 우울증과 같은 질환을 앓았거나 앓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색안경을 낄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내 생각엔 우울증에 걸렸다면, 그 즉시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급성 우울증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갑자기 찾아오는 우울감은 사람을 벼랑까지 몰고 간다. 특히 이 우울증이란 그림자 같은 놈은 평생 떼어내기가 힘들 뿐더러, 누구나 걸릴 수 있다. 그렇다고 우울이 찾아왔을 때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약을 먹으면 효과가 바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일반인들이 평상시 겪는 우울 빈도보다 더 잦고 깊게 나타나는 게 우울증이다. 정도의 차이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봐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리고 질염 등 여성 질환에 걸렸거나 걸린 적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말에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 당연히 밝혀도 된다. 성과 관련된 질환일수록 숨기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누구나 걸릴 수 있고 감기처럼 걸리기 쉬운 질환이다. 특히나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방(남자)을 통해 옮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특정 병력을 가진 게 죄처럼 여겨져서는 절대 안 된다. 


그렇지만, "과거 경험을 남자친구에게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유튜버의 말에는 공감한다. 그리고 반성한다. 나는 과거 남자친구들의 이야기를 쉽게 떠벌렸다. 나는 20대 중 6년을 한 사람과 사귀었고, 과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 이야기가 섞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었다. 또, 과거에 내가 어떤 연애를 했었는지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전 남자친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지금이라도 사과의 말을 전한다. 그들이 이 글을 보진 않겠지만……. 앞으로 나는 전 남자친구들과의 연애사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성심성의껏 대답해줄 수 있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고 나의 당당한 과거이니까 숨기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랄까. 


그는 재정 상태 또한 남자친구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작년 퇴사한 후 퇴직금을 모조리 탕진하고 거지로 살아왔다. 퇴사 후 사귀었던 남자친구들은 모두 내가 거지인 것을 알았다. 돈은 어디로 자꾸 새는 건지,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해도 꾸준히 거지였다. 요즘 같은 물가로는 고깃집에서 한 끼(고기+술)를 먹으려면 6~7만 원 정도 드는데 그 돈도 없어서 항상 계산하는 남자친구들 뒤에서 쭈뼛거렸다. 내가 봐도 정말 찌질하고 쪽팔렸다. 

▲현재 내 상황과는 상관 없는 노숙자 이미지. /Flickr

남자친구가 자연스레 계산한 후에는 미안한 마음과 쪽팔린 마음을 가득 담아 "다음엔 내가 살게……."라고 불쌍하게 말했다. 물론 나는 그 후에도 데이트 비용을 연달아 내지 못했다. 남자친구들은 괜찮다며 알겠다고 말했지만 자꾸만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곤란해 했을 것이다. 내 재정 상황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나와 사귀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거지라는 것을 알게 되니 인생이 이렇게 고달플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나는 유튜버가 말한 것처럼 내 재정 상태를 말하지는 않은 셈이다. 


나는 신체적 콤플렉스라기보단 내 신체의 비밀에 대해서도 남자친구들에게 떠들었다. 이쯤되면 나는 남자친구들에게 숨기는 것 없이 살아온 정직한 청년이다. 내 남자친구들은 내가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건 그냥 술 먹다가 내가 떠벌린 것 같다. 술을 먹다 보면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 내가 대학생 때 술 먹고 바지에 실례를 했던 것도, 수능 끝나고 얼굴 대공사를 마친 후 집에서 은둔 생활을 했던 것도, 부모님이 이혼하신 것도 자연스레 다 말했다.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디서든 나를 희생해 개그맨이 되려 하는 본능 같은 게 있다. 그 본능은 술을 마시면 더욱 심해진다. 내 생각에 난 아마 그래서 나의 비밀들을 모조리 다 떠벌린 것 같다. 


최근 사귄 지 40일 된 현재 남자친구에게도 난 지인 뒷담화, 특정 병력·과거 경험 언급 등을 모두 했다. 나도 모르게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들을 한다고 나를 나쁘게 보거나 깎아내리는 사람은 내가 끊어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된 이상 나는 그냥 쉬운 여자로 살기로 했다. 쉽지만 비밀이 없는 진실된 사람. 옷이든 나의 비밀이든 입고 싶으면 입고 말하고 싶으면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은 나를 쉽게 대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쉽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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