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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Mar 21. 2024

병원에 가다

나의 증상들에 대하여

나는 친구의 권유로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게 됐다. 친구가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을 땐 놀라웠다. 학창시절에 마냥 밝았던 아이가 정신병원에 다닌다니.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에게 말하다니.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까지 친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당시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난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폭식·폭음을 한 후 끊임없이 게워낸다는 사실은 더더욱 숨겨야 했다. "너는 그렇게 많이 먹고도 어떻게 살이 안 쪄?"라는 말이 항상 듣고 싶었다. '살 안 찌는 부러운 체질'이라는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나는 퇴근 후 술을 먹고 울며 불며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게 취미였다. 현재는 일을 그만두고 본가에 살고 있지만 그때의 나는 서울에서 자취를 했기에 술 먹는 것도 자유로웠다. (나는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해대는 성향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손절 안 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내 전화를 받은 친구들 중 유일하게 병원에 다니고 있던 친구가 병원에 내원해서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병원 다니면 어때? 약 먹으면 우울감이 좀 나아져? 나도 가봐야겠다"는 말만 앞세우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아마 마음 한 켠에 이미 나 스스로 고칠 수 있다, 의지가 중요하다 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잦은 빈도로 우울감이 찾아왔고, 폭음과 폭식은 더더욱 심해졌다. 밤마다 원인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불면증도 덩달아 심해졌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 4시간 이상은 자야 하는데, 새벽에 자꾸 깼다. 총 수면시간이 1~2시간에 불과할 때도 많았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고 비관적인 생각만 계속 들었다. 우울증도 우울증이었지만 불면증이 나를 가장 괴롭게 했다. 결국 이렇게 살다가는 요절할 것 같아 병원을 찾게 된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당장 가서 내 증상을 털어놓고 "선생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나아질 수 있을까요?" 하며 정답을 찾고 싶었는데, 한 달 내 예약이 모두 차 있었다. 세상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병원에 다니면 나아진다고 하니, 한 달 뒤 어느날로 예약을 잡았다. 병원에 갈 땐 친구가 권유한 대로 휴대전화 메모장에 나의 증상들을 모조리 적어서 갔다. 당시 내가 적어갔던 증상들은 이렇다.



1. 불면증이 심하다. 잠에 들려고 눈꺼풀이 감기면 아득한 세계로 푹 빠지는 것 같고 다시는 깨지 못할 것 같아서 계속 눈을 뜨게 된다. 잠에 들더라도 1시간 만에 깨는 일이 많고 깊게 잠들지 못해 자꾸 꿈을 꾸는데 현실 같아서 헷갈릴 때가 많다.


2. 감정기복이 심하다. 인생 어차피 다 죽음으로 끝난다는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데 어떤 때는 잘 생활하다가도 죽어서 내 존재가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빨리 뛰면서 무섭다. 또 일이나 자기 개발을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으쌰으쌰하다가도 갑자기 무기력해지면서 사람에 대한 화가 너무 많이 나고 다 때려치고 싶다.


3. 시간 개념이 없다. 보통 약속시간 두 시간 전부터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인지하고 있지만, 어떤 이유든간에 결국 약속시간에 늦는다. 화장실에 들르든 화장을 더하든 옷 고르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든 항상 늦는 쪽이다.


4. 경제 관념이 전혀 없다. 돈이 있으면 그냥 막 써버리고 싶다. 배달음식도 남들 같으면 정말 먹고 싶은 메뉴 하나만 시킬 텐데 나는 최소주문금액과 상관없이 먹고 싶은 걸 대부분 다 시킨다. 이거 먹으면 50만원쯤 남겠지, 내가 이 정도 돈이면 월급 받기 전까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택시도 약속시간에 지하철 타는 것과 5-10분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약속시간에 조금 늦게 된다거나 조급해지기 싫다는 이유로 막 탄다.


5. 10년간 이어져온 먹토. 몸무게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1년에 한 번 어쩌다가 체중계에 올라설까 말까다. 외모에 대한 강박도 심하다. 계속 먹고 토하고 허하면 또 음식을 찾기 때문에 하루에 음식을 여섯번 이상 시켜 먹은 적이 있다.


6. 이전 회사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매우 불안한 상태고 자꾸 눈물이 난다. 회사 다닐 때는 차라리 내가 죽을 병에 걸려서 쉬고 싶다, 교통사고 당하고 싶다 등등의 생각을 많이 했다. 퇴사한 후에는 자존감이 매우 떨어졌고 다른 회사를 못 가게 될 것 같아서 매우 불안한 상태다.


7. 건강을 돌보지 않고 나 스스로든 집이든 청결 관리가 되지 않는다. 물건을 사용하면 제자리에 놓는다거나 먹고 바로바로 치우면 나중에 쌓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도 실행하기가 어렵고 쌓이면서 치울 의욕조차 사라진다.


8. 자꾸 화가 난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고 상대방도 나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고 잘못한 게 없고 트러블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욕을 하고 있음. 이유는 모름. 가끔은 사람을 죽이는 상상도 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좋은 말을 해도 속내를 의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선 짜증이 날 때도 많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걸 알고 내가 전혀 잘난 사람이 아닌데도 직업으로 판단하는 것도 심해짐.


9.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이유 없는 불안이 찾아올 때가 많다.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는데도 뭔가를 자꾸 빠뜨린 것 같은 생각에 초조해진다.


10. 물건을 자꾸 잃어버리고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집에서도 물건을 잃어버리고 찾지 못해 새로 산 적도 있음.


11. 무기력이 매우 심하다. 어느 정도냐면 4월에 건강검진을 받고 안 좋은 결과가 나와서 빨리 내원해서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들었는데 아직까지 병원에 안 갔음. 병원 가는 것을 비롯해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가는 것도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계속 미룸.



병원에 가서는 휴대전화를 들고 메모장에 적어둔 내용을 몽땅 의사 선생님께 읽어드렸다. 그후에 꽤 많은 양의 검사지를 받아 들고 다시 나와 내 증상이 어느 정도인지 체크해야 했다. 길거리에서 또는 학교에서 설문지를 받아서 체크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그것도 나에 대한 질문이 가득한 검사지를 받아든 건 처음이었다. 'YES'나 'NO' 중 고르는 것도 있었고, 5점 만점에 몇 점 정도인지 체크하는 것도 있었다. 마음 같아선 모조리 안 좋은 쪽에 체크하고 싶었지만(체크하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꽤나 무기력하고 부정적이었다) 그런 건 친절한 의사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찬찬히 읽고 꼼꼼하게 체크해 나갔다.


검사지를 제출하고 몇 분이 흐른 후 나는 다시 의사 선생님께 호출됐다. 선생님은 내가 우선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일어나서 나의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어느 정도인지 몸소 보여주셨다. 선생님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서서 손바닥으로 눈 앞을 가리셨다. "혜빈 씨한테 우울이 지금 이 정도로 다가와 있어요. 그래서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상황이에요." 그러면서 우울이 너무 가까이 막고 있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상태이니 약부터 먹고 어느 정도 나아진 후에 상담을 병행하자고 하셨다.


나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답답했다. 내가 우울증인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데 왜 자기 객관화가 안 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이 우울의 원인에 대해 우선 이야기를 나누고 해결책을 내려주셔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정신병원 의사 선생님들은 부모님보다 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정도로 힘드셨군요"하며 내 편이 되어줄 줄 알았다. 그리고 해결책 또한 제시해줄 줄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들을 신이자 척척박사로 인지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일단 집에 돌아와 약부터 입에 털어 넣었다. 내가 처방 받은 약은 푸록티캅셀(항우울제), 가스몬정(위장약), 환인아캄프로세이트정(알코올의존 완화), 스리반정(신경안정제), 인데놀정(신경안정제), 리보트릴정(신경안정제)였다. (병원에서는 직접 약을 처방해주고 별도의 처방전을 주지 않아서 내가 요구해 간호사님께 받았다) 신경안정제류가 가장 많은 것을 보고 내가 신경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약을 꾸준히 먹고 나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지 약이 잘 들었다. 나는 아침, 점심, 저녁, 취침 전으로 하루 4번 약을 복용해야 했는데, 약을 먹으면 우울하던 기분이 마냥 나아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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