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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스크 환자의 나날 Jun 16. 2024

아 속의 비아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 건가. 이전에는 제대로 하지 않았군."

 

 약간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목소리에게 속으로 '맞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어차피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남자는 이미 뭐라 대답할지 둘러대는 내 생각을 다 알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심하게 말한다. 멋쩍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하얀 모니터 화면 속에 점멸하는 텍스트 커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나와 모니터 사이, 작디작은 날벌레 하나가 위잉 날아간다. 눈동자는 벌레를 좇아보지만 순식간에 휙- 하고 사라진다. 뒤통수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집중해야지."

 "하지만 아무 생각도 안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


 흐음-하며 생각에 잠기는 소리를 내는 남자를 휘휘 손으로 내저어 없애본다. 이 친구도 영 아무짝에 쓸모없었다.


 예전에 어느 만화였는지 혹은 소설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자기 자신과 바둑을 두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끝에 누가 이겼는지는 알지 못해도 그 장면만큼은 세세히 그려진다. 스스로 거울을 보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바둑은 내가 마음이 기운 돌에 점차 승리를 쥐어주게 마련이다. 흑돌이 우세하다면 어느 순간 백돌을 집중해서 놓고, 그 반대의 상황에선 흑돌을 언더독 효과처럼 화려하게 백돌을 잡아먹는다. 돌을 놓는 사람은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 상황의 아이러니함이 좋았다. 마지막에 승리하게 되는 돌은 내가 마음이 기우는 곳이고 그것을 오로지 결정하는 것은 순간의 내 기분이다. 내 안의 나를 이긴다는 만화적인 상상은 따지고 보면 그저 내가 어느 손을 들어줄지는 나조차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확고한 내 마음의 선택 전까지 나는, 나도 모르는 나와 싸우고 있다면, 결국 그전에 쌓아 온 모든 과정에서 대결 상대는 과연 누구일까. 모든 것이 나라고? 잘 모르겠다. 이미 사라진 사람에 대해 어떤 말을 붙여도 진실도 같이 증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걸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아니면 그 돌은 누가 놓은 것일까? 흑돌이 이겼으면 하는 바람에 매섭게 두었지만 막상 백돌 차례엔 손쉽게 막아내는 나는, 차례에 따라 목표도 달라지는 사람인 건가. 


 "엉터리야. 엉터리."


 이렇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디에 써먹나. 그렇다면 사람들은 한 번도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한 일이 없다는 걸까? 각각의 아와 비아들의 대립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 모든 선택의 순간을 아로 확신 할 수 있는 증거는 뭘까.


 "피곤해서 그래. 아니, 피곤해서 그랬어."


 나는 어떤 착상도 떠오르지 않은 채, 껌뻑이는 텍스트 커서를 바라본다. 피곤해서 그랬다는 변명을 하는 나와 그것을 듣는 나는 똑같은 나일까. 역시나 잘 모르겠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틸팅 기능이 아주 좋은 의자에 거의 눕듯이 기댄다. 천장을 바라보며 의자를 돌린다. 뭔가 습관처럼 발을 놀려 의자를 빙빙 돌리는 것이, 아 이것도 나인가? 나도 모르는 습관을 가진 나라니.


 이렇듯 끊임없이 '나'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보통 남는 것은 텁텁한 뒷맛 밖에 남지 않는다. 마치 몇 시간 동안 열심히 요리한, 온갖 에너지를 쏟아서 만든 스테이크를 이제 다되었다 하며 창 밖에 던지는 기분이다. 다만 한껏 뜨거워졌던 프라이팬만큼은 그대로 남아 강렬하게 열기를 내뿜는다. '궁금하지?', '알고 싶지?', '그런데 다 안다고 해서, 뭐가 더 나아질까?', '아 속에 비아를 찾는 것이, 비아 속에서 아를 찾는 그것이 과연 무언가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걸까? 도피 아닐까? 공상이겠지.'

 그들은 열심히 무용에 관해 떠든다. 자신들의 무용함을 이렇게나 어필하다니. 오히려 이런 모습이 비아인 걸까?


 "그만."

 

 무척이나 우울해진 나는 발구르기를 멈춘다. 방 안은 조용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일지도 모르지.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의자를 똑바로 당겨 앉아 모니터의 하얀 화면을 마주 본다. 점멸하는 텍스트 커서들, 속의 나,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담아두었던 추억들을 꺼내어 본다. 이윽고 텍스트 커서가 움직이고------. 

 

 황량한 사막, 회전초가 굴러간다. 칙칙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몸집이 점점 커지는 회전초들이 물소 떼 마냥 모래 위로 질주하고 있다. 서로의 방향이 같지 않기에 회전초끼리 엉겨 붙어 그 자리에 멈춰 버린 것도 있고, 혼자 옆길로 맹렬히 굴러가는 회전초도 있다. 장애물도 없는 곳에서 바람은 자기 맘대로 휘젓고 다닌다. 


 칙칙 소리를 내며 회전초가 굴러간다. 빙글빙글 의자도 돌고, 나는 열심히 발을 굴린다. 나는 나도 모르는 나의 파도 속에서 칙칙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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