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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 눈 내린 풍경.
설경이 주는 감상은 사람에겐 언제나 가득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눈 덮인 골목, 그리고 자동차, 눈이 가느다란 실처럼 쌓인 나뭇가지들 그리고 새해가 온다는 설렘과 한 해의 마무리, 또 도시를 뒤덮는 캐럴과 노란 전구들, 이미 매년 있는 일들이지만 매번 새로운 감정으로 맞이하는 감상 속에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특별한 겨울은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기억이 남는 설경이 몇 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하나씩 써보려 한다.
설경이라 생각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 대부분은 거의 군대에 관련되어 있다.
처음 설경은 전방 근무를 할 때였다. 철원 평야 쪽에 위치했었는데, 근무지가 약간 동산처럼 생긴 곳 위였다. 군인들에게 눈이란 너무나 끔찍한 작업의 시작이지만, 그땐 예상보다 눈이 온 횟수가 적었기에, 적어도 매일 눈을 쓸지는 않았다.
여하튼 아침 6시 경계 근무를 나가게 되면, 해가 슬슬 떠오르기 전, 저 지평선 너머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때였고, 산에 쌓인 눈들이 이제 검게 묻혀있다가 제대로 보일 때였다. 조그마한 동산 위에서 본 엄청나게 거대한 산들이 쭈욱 눈 쌓인 논밭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조금씩 올라오는 햇빛들이 그 산 위를 다시 타고 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의외로 서울에 살면서 널찍하게 탁 트인 곳을 본 적이 없었다. 동네에 산도 있었지만, 등산은 취미가 아니었고 또 전망대나 이런 곳에 딱히 가볼 일이 없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해봤자, 해외에 나갔을 때 도시 전망대에서 몇 번 야경을 감상했지만, 감명은 없었다. 어쩌면 해가 지고 불을 켰을 땐 저녁의 서울과 다 비슷해 보였다. 낮에는 비쭉비쭉 솟은 회색 건물들이 서로 다름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마저도 다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철원의 설경은 절경이었다. 산등성이의 거뭇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르고 그 밑으로 쏟아져 내리는 하얀 쌓인 눈들이 엄청난 파괴력으로 정말 심장을 탁하고 뚫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솟는 해는 정말 장관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은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지나다니는 차도 없고 논밭만 있어서 정말 겨울 왕국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보름달이 휘영청 뜬 날에는 낮과 밤이 다를 바가 없었다. 달빛이 쨍하게 지상에 내려오면, 다시 눈이 사방팔방으로 달빛을 쏜다. 정말 쏜다는 말처럼, 온 동네를 밝히는데, 그 정도가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도 보일 정도였다.
"옛날 사람들이 밤에도 다닐 수 있다는 게 전부 거짓말은 아닌가 봅니다."
근무를 서고 있는 부사수가 코를 후비면서 말했다. 이 친구는 항상 여유로운 말투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쉴 새 없이 하는 친구였다. 덕분에 항상 근무시간이 후딱 가는 편이었다. 나는 초소 안에서 발을 탁탁 구르면서 말했다.
"그런가? 하긴 저 멀리 잘 보이네."
별 흥미 없는 대꾸에 부사수는 발로 툭툭 돌을 찬다.
아침에 같이 근무를 설 땐, 잠결에 눈도 못 뜨고 초소 밖에서 빙글빙글 돈다.
"야, 해 뜬다. 저거 봐 진짜 멋있지 않냐?" 하면,
"어차피 저는 저거 두 번 더 봐야 합니다. 별로 안 멋집니다." 하고 크게 하품을 한다.
"아이, 지금 하필 사진기가 없네."
그때 부산스럽게 소대원들이 움직인다. 아침 점호 시간이었다. 흡연장에서 뻐끔뻐끔 담배를 펴고 다들 엉금엉금 점호를 받으러 간다. 겨울 공기의 찬 바람이 쉭하고 지나간다.
크게 하암 하품한 부사수는 초소를 뱅글뱅글 돈다. 나는 높게 솟은 산들 사이로 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참으로 절경이다. 머리가 간지러워 쓰고 있는 방탄모를 벅벅 긁는다. 바보 같은 모습에, 다시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긁는다. 몇 겹으로 겉옷을 입어도 찬 공기가 속까지 파고 들은 철원의 겨울이었다.
연합뉴스 사진에서 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