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분노하고 행동하게 되는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노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한다고 했고, 여동생은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나는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누를 때라고 답했다. 우리 셋은 각자 참 다른 성격을 가졌지만 듣고 보니 모두가 비슷한 지점에서 분노했다.
내가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단연 ‘슬픔’이지만, 어떤 때 슬픔은 그 꼬리를 찾아 따라가다 보면 ‘분노’와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혹은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의 강렬한 분노는 그 끝에 깊은 슬픔이 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화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살면서 분노를 표출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그것은 마침 남편(그때는 동료였다)이 있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남편도 잘 기억하고 있다. 캐주얼한 회의 자리였고, 새로 온 중간관리자가 지난해 우리가 했던 일에 대해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당연히 기분이 나빴지만, 인격적으로 존경할 수 없는 어른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해 열심히 한 일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 너희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것.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벌 받는 아이처럼 두 손을 무릎에 올린 후배들의 눈에 무력한 분노가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설사 그 일들이 정말 잘못된 것일지라도 노력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했고, 그것은 한 팀으로서 최소한의 서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고, 처음에는 차분히 단호하게 말을 이어 나가다가 나중에는 결국 감정이 북받쳐 울며 말했다. 놀라서 뒤늦게 뛰어온 관리자에게 우리의 실적물을 들이밀며, 당신은 이것을 제대로 보셨냐고,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난처해하며 나를 달래던 기억이 나는데, 얼마 뒤 우리는 학교 앞 작은 식당에서 어색하고도 자연스럽게 술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나는 상 끄트머리쯤 비주류의 자리에 앉아 후배들과 말없이 위로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찌개에 밥을 비벼 먹었다. 당시 동료였던 남편은 나와 멀리 주류의 자리에 끼어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면 눈물부터 났던 설익은 시절의 나였다. 하긴 그래봐야 스물일고여덟 즈음이었고 제대로 화내기보다 눈치껏 행동하는 것부터 배웠던 사회초년생이었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나는 '나를 움직이는 분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것이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거대한 불안과 욕구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로 조용하게 뒤로 빠져있는 내가 이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이 정의를 이긴다’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용기 있는 아웃풋으로 흔들리는 믿음을 다 잡았듯이, 나의 작은 행동으로 그들도 용기를 갖고 인간의 선함과 정의를 다시 믿어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에겐 그럴 힘이 있음을 끝까지 믿고 싶다.
믿기 위해 끊임없이 내가 그 믿음의 증거가 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