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게 무엇이 되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아부지는 뜬금없이 선을 보지 않겠느냐 했었지. 이게 뭔 조선시대 부모가 울고 갈 소리냐며 들은 척도 안 했으나 부모가 딸에 대해 가진 기대가 딱 그만큼이었구나 확인했던 순간이었다. 기대가 그러했으니 내가 자식 중 가장 눈에 띄는 학교 성적을 냈어도 무어라도 할 수 있으면 해보라거나 더 노력해서 더 높이 가보라는 말을 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라 짐작하곤 했다. 책 읽는 딸보다는 집안 일을 기꺼이 잘 돕는 딸을 원했으니 그랬겠지 추측하기도 했고.
그의 가장 큰 사랑이자 기대주였던 아들은 어릴 때 누가 봐도 잘 생긴데다 똘똘하기도 했다. 심지어 지능검사 결과 뛰어나게 머리가 좋다고 교사들이 알려줄 정도였으니 아마도 그 아들에게 알게 모르게 기대를 한 게 있었겠지. 아들이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그는 아들에게도 무리한 기대와 요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막내 아들이 맏딸 정도만이라도 학교 성적을 냈다면 아마도 물심양면의 지원을 하지 않았을까. 그가 여러 모로 존경해 마지 않았는데다 심지어 아들들을 차례차례 명문대로 보내 더욱 우러러보았던 사촌 올케를 거울삼아서.
대학을 졸업하고 의미와 가치를 좇는다며 지지부진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어느 시기부터 다시 공부를 이어가는 맏딸에 대해 대입 원서를 쓸 때 좀 더 과감하게 지원하도록 지지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더란 얘기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바로 밑 동생에게서 근 이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전해들었다.
대학 원서를 쓸 때 재수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단 게 부모의 기준이었어서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학교 중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내 나이 또래들이 입학을 하고 상급학교로 올라갈 때마다 급작스레 시설을 늘리거나 오전 오후반을 새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아이들이 많다 보니 입시를 치르던 해에도 중위권부터 하위권 대학의 경쟁률이 유래없이 높아서 언론에서 연일 기록갱신 보도가 날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중상위권 대학 중엔 원서접수 미달인 학과도 있었고.
그 결과 그의 친구나 아부지 동료들의 또래 자녀들과 내 친구들을 포함해서, 나중에 만나 알게 된 거지만 남편 친구들까지 전기대학에 단번에 붙은 이가 주변에는 나 하나인 상황이 되었다. 아부지 직장 동료만 해도 나랑 동갑인 아이들이 대여섯 정도 되었는데 나 빼고는 모두 다 전기 대학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워낙에는 해마다 자식들 대학 합격 축하 회식을 하던 관행도 그 해에는 유야무야 그냥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고.
어쩌면 그때서야 부모는 큰 딸에 대해 조금 더 격려를 하고 조금 더 지원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듯하다. 그리고 뒤늦게까지 공부의 끈을 이어가는, 기대하지 않았던 자식의 행보를 볼 때마다 새롭게 돌이켜 보게 되곤 했나보다. 대학 졸업 때까지는 여러 여건 상 부모 집에서 생활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부모와 생활하며 돈을 모으는 선택을 했으나, 졸업 후에는 공부든 뭐든 내가 하고픈 걸 할 거면 내 힘으로 하리라고 일찌감치 정해놓았던 내게는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 전해들은 그의 뒤늦은 미안함이 뜻밖이기도 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