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 관심 그리고 기억

by 논스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3월이다. 첫날이다.


시업식이 끝나고 이제 담임교사와의 시간이다.

'휘어잡아야 해! 그래야 1년 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선배 교사들이 귀에 따갑도록 이야기했다.

'그래... 내가 얼마나 엄격하고 무서운지 보여주지. 오늘로 결판내고 1년 동안 우리 교실은 조용할 거야'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본다. 그리고 뒤로 돌아 칠판에다가 이름을 또박또박! 강하게! 딱딱 끊어서 적는다.

1년 동안 주의할 점. 금지사항... 등을 적으면서 엄격하게 설명한다.

그리곤 결의에 찬 모습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제껏 너희들이 어떤 선생님을 만나고 겪었는지 모르지만.... 난 다를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유치한 말인가. 23년 전의 내 모습이다. 전자칠판도 아닌 흑판에다 분필로 설명을 하던 그 시절이다. 교사된 지 6개월이 지났다. 아이들을 대하는 기술과 태도는 오로지 엄격함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그 시절이다.


2시간 동안의 지루한 설명이 끝나고 간단한 교실 정리를 한다. 아이들은 사물함에 책과 문구류들을 정리하고 있다.

짬이 나서 선생님들에게 업무 관련 회람 종이를 돌려야 할 시간이다. 교내 메시지 프로그램도 없어서 선생님들의 업무 내용 전달도 직접 종이로 전달하던....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자... 이 종이를 전 학급에 회람을 돌려야 하는데... 누구를 보내지? 아.... 누가 똑똑하다고 이야기했는데... 누구였지?'

새 학급을 맡으면 이전 학년도 담임선생님들이 습관처럼 들려주는 이야기.

"그 반에 누구는 똑똑하고... 누구는 당돌하고.... 누구는... 하...."

아이들에 대한 정보이다. 누군가가 똑똑해서 심부름을 시키면 잘한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마침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나 시키면 되지. 고작 회람 돌리는 것을 똑똑한 아이를 찾아서 심부름을 시키나. 그냥 시키자.'


"넌 이름이 뭐니?"

"네? 저요? 영미요"

"영미야. 너 이거 가지고 1학년 1반부터 6학년 끝반까지 갔다 와라"

깜짝 놀라는 눈빛이다.

그러더니 고개를 45도 밑으로 숙이면서 살짝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네!" 하고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회람 종이를 받아 들고서는 교실 문으로 달려 나간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영미가 다시 들어왔다.

"선생님 다녀왔어요"

"그래... 수고했다."


시간이 흐르고 수업이 마쳤다.

아이들은 모두 하교하고 이제 나만의 시간이다. 그런데....'어? 쟤가 왜 집에 안 가지?'


"영미야... 넌 왜 안 가니? 무슨 일 있니?"

"아니요... 그냥이요"

"집에 어른들이 기다리겠다. 얼른 가"

"집에 가도 아무도 없어요. 여기서 조용히 있다가 가면 안돼요?"

"그래? 그럼 너 편한 대로 해"

조용히 있다 가기는.... 계속 주변을 얼쩡거리며 말을 붙인다. 뭐해요? 이건 뭐예요? 샘 무슨 음식 좋아해요? 몇 살이에요.... 4학년 여자아이가 할 법한 질문들을 쏟아 낸다.

조용히 하라고 말하려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일 하면서 다 받아줬다.


"샘! 저 샘 좋아요"

'읭? 첫날부터 좋다고 이야기를 해?'

"뭐라고?"

"저 오늘 심부름 첨 해봤어요. 선생님이 항상 심부름은 다현이 시켰는데.... 저 오늘 심부름 첨 해봤어요. 그래서 저 정말 좋아요."

"그래? 그럼 내일도 해~!" 선심 쓰듯이 심부름의 전권을 주려던 잘나에...


"안 돼요! 그럼 다른 애들이 싫어해요. 작년에도 다현이만 심부름했어요.... 저도 하고 싶었는데... 내일은 영주 시켜주세요. 영주도 심부름하고 싶다고 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닌 심부름이 특권이었구나. 그런데 이 아이는 그 특권을 오늘 가졌고... 더 놀라운 것은 내일 그 기쁨을 친구에게 양보하는구나.


"너... 참 착하구나"

영미가 배시시 웃더니..."저 집에 갈래요" 하고는 가방을 들고 달아나듯이 뒷문을 빠져나갔다.


그날 이후 심부름은 번호순이 되었다. 20여 년이 흐름 지금도 심부름은 번호순이다. 예전처럼 아이들이 직접 심부름할 일이 많이 없지만... 그래도 심부름은 번호순이다.


영미의 그 말과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했을 때의 행복감. 그리고 그 특권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친구 더 나아가 반 전체와 나눠가지려 했던 공정함.

어른이 된 사람들 중에 누가 그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많이 본 적이 없다.

더 가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동, 서양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말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만 가지면 충분하다고.

영미는 4학년 어린 나이에 그 철학적 마음가짐과 태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년 동안 영미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 첫날 오후처럼.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어머니가 바쁘신 이유. 아빠가 없는 사연.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공부가 싫다는 비밀....


영미는 잘 살고 있다.

제법 거리가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살면서 해마다 2번의 문자를 보내온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추석 잘 보내라고.

카톡 프로필 사진에는 녀석을 꼭 닮은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손을 잡고 찍은 아름다운 풍경을 걸어놓았다.


심부름 한 번에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던 어린아이가.... 다 커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교사의 특권이다.

영미에게 배운 삶의 철학을 지금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공정하라. 그리고 내가 필요한 만큼 가지고 나머지는 나눠주려 노력해라.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6화괜찮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