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중간중간 맞추는 것과 같다
퍼즐은 언제나 재밌다
난 기억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고 싶다. 기억이란 건
"나"란 사람에 있어 무수히 많은 피스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라고.
그 퍼즐의 그림은 각자의 이룬 꿈, 혹은 그리던 이상향이 되겠지만, 퍼즐의 부분 부분은 우리의 기억이라고. 과거가 있기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퍼즐을 맞출 때,
누군가는 바깥쪽에서부터 맞춰갈 것이고, 누군가는 부분 부분 그림을 생각하며 맞출 것이고, 다 맞춘 다음엔 결국 모든 피스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생각과 기억은 그러데이션이니깐. 자연스러운 시간흐름 속에서 발생한 연속적인 시점선들의 집합.
그동안 왜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비연속적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기억이 나는 대로 적다 보니 체육대회를 얘기 못했던 것 같다. 꼭 적지 않아도 되지만 퍼즐파편을 하나라도 더 찾는 게 날 찾는데 도움이 될까 적어본다.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행여나 치료방법에 있어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실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기억이 갸우뚱한 체육대회
나 땐 체육대회를 하면 반티란 걸 꼭 구매했었다. 반티란 단체 체육복 같은 느낌이다. 축구콘셉트, 군인콘셉트. 동물 등 다양하고 단순히 옷만 사는 게 아니라 등에 꼭 닉네임을 적어야 했다.
옷에 생겨진 닉네임 꼭, 선수시절 대표로 뛰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렇기에 단순히 고등학생들이 재미로 하는 닉네임이 아니라 뭐랄까 뭔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졌다. 등에 닉네임이 적힌다는 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니깐.
난 한참을 고민해도 결정을 못 내렸다.
또한 내가 돈을 주고 내심 내 옷이 생긴다는 거에 좋고 기분이 묘했다. 가격은 5000원에서 10000원 남짓했지만, 몇 년 만에 내 옷이 생기는 건지 기뻤다. 돈을 주고 옷을 사본적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내 옷이 생긴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내 일생에 다신 안 올 기회라고 생각해서 너무 신중해진 나머지 쉽사리 등이름 결정을 못 내리자 여사친들이 이쁜 이름을 적어주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까칠하면서도 순둥한 그런 닉네임.
비록 하루만 하는 행사였지만, 나름 축제였기에 현수막, 체육, 요리, 춤, 장기자랑 다양한 파티션을 했었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오늘은 놀자, 오늘만큼은 즐기자라고 생각했다. 수능을 위해 달리는 걸 잊은 채 우리 반은 무엇을 할 건지 정함과 동시에 반이 1등을 하면 크나큰 상품이 있기에 점수를 많이 딸 수 있게 자신 있는 종목을 정하기로 하였다.
난 솔직히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루 종일 피시방이나 가있을까 생각했다. 시끄러움 속에서 스포츠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하하 호호 웃으면서 화목한 게 싫어졌고 나에게 행복은 가상 속에나 존재하는 거였다.
그래도 같은 중학교와 지인들의 의견제시로 축구를 할까, 농구를 할까, 배드민턴을 할까, 육상을 할까,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추천을 거절하기엔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이 싫었고, 그래도 문득 나도 행복을 추구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였기에 차분히 고려를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래 생각해 봐도 그렇게 나가고 싶지 않았다. 뭔가 체육대회인데 진지하게 몇 년 동안 선출이었던 얘가 나가면 재미로 하던 게 재미없게, 진지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오지랖이었다.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운동은 노력은 노력대로 나름 중요하지만 결국은 피지컬 차이가 컸다. 적어도 스포츠에서의 나의 생각은 그랬다.
체육대회 결과를 미리 써보자면,
고1 당시 160 초반이었던 난, 그동안 운동을 해왔던 덕에 겨우겨우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이 운동을 조금 배웠더라면 날 이겼을 것이다. 큰 키의 학생들과 겨룰 때면 그리고 그들과 결과가 비등비등하면 운동을 그만두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름 재밌는 체육대회였다. 단체사진, 응원, 행복, 기쁨. 저물어가는 노을과 파티. 아름다웠다. 난 어쩌면 행복한 사람들을 동경하고 질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남들 다 편안해하고 행복한 시절 고통을 느꼈으니깐, 그래도 아버지가 나한테 약속을 주신 이유는 있을 거라고 믿는다.
소박한 좋은 훈수 적어보기
사람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아무리 예측한다 하더라도 결국 수치상인거지, 흑백논리만 갖고 보자면 모든 미래는 50대 50이다. 저것도 결국 수치지만.
내가 키가 180이 넘게 될 거란 걸 누가 알았을까. 부모님 두 분 키가 160 근방이셨는데 나의 확률은 어떻게 될까. 심지어 성장기에 혼자 살며 잘 먹지 못했는데란 조건을 첨가하면 확률은 더 떨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토대로 미래를 계산해서 시도를 할지 포기를 할지 결정하곤 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난 포기는 하지 않는다. 수치상 확률이 미미하더라도 믿기 나름이니깐.
요즘 말로 꼰대가 된 것 같지만, 하고 싶다면 도전해라. 확률을 스스로 올리기 위해 노력해라.
결국에 이룰 수 없는 것도 이뤄질 것이고, 모든 것이 뜻 대로 될 테니깐.
스님은 요새 뭐 하시고 계시려나?
이것도 기억 속 한 부분인데, 스님을 만났던 이야기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불교를 믿으셨다. 물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교회로 바꾸셨다. 난 무교이다.
난 나를 믿었다. 과거에 난, 누구에게 의지를 하기보단 스스로 종교를 만들었다.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감자돌이교라고 날 믿는 종교였다. 고등학생시절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걸 믿지 않았다. 그들의 힘듦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남에게 의지한다고 생각해서 정말 나약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자신을 안 믿고 의지를 못하나고 나약해 보였다.
애기시절 종종 부처님 오신 날에 유명한 절들을 가봤다. 절밥과 꽃전을 먹으면서 놀고 그랬었다. 그때 절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이. 나에 대해 미래를 예측했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애기 때 1번 유치원 때 1번 초등학교 저학년 때 1번. 그리고 내가 다쳤을 때 고등학생 때 1번.
내가 처음 발병을 하고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다.
다짜고짜, 스님이 용하다더니 다 사실이었어.
계속 그전까진 그때 스님 말을 들었어야 한다고 하셨다.
내 어머니지만 그저 스님의 말에 의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그것마저도 한심했었고 나약하게 보였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횡설수설 말씀하셨지만,
정리를 해보면,
아이를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좋고 나쁨이 뭔지 모르고 호기심이 강하니깐, 가르쳐줘야 한다. 훗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세상에서 유명해질 것이다.
정신은 강한데, 신체가 약해서 운동을 시켜줘야겠지만, 결국 신체가 못 버티고 신경이 아플 것이다.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하는 얘다.
한 없이 순수하고 남을 잘 도와주면서 세상이 다 잘 되길 원하지만 사람들에게 데인다면 점차 어두워질 것이다.
본인의 가치관과 신념이 무너지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렇기에 확실한 동기부여를 줘야 한다.
인생이 많이 험난한데 결국엔 잘 이겨낼 것이다.
솔직히 들었을 땐 나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진심으로 믿으셨다. 내가 신경이 끊겼을 때, 그리고 결국 신념을 잃고 어두워졌을 때 스님을 찾아가셨다고 한다.
어떤 기분일까? 유치원 때, 초등학생 때, 태어났을 때, 보던 남자아이가 본인 말처럼 자랐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정답을 요하고 싶다. 어머니의 말처럼 그렇게 신통방통하신 분이라면 더더욱 여쭤보고 싶다.
정말 내가 중학생 때 더 발전했더라면 더 전성기였다면 그를 살렸을까. 돈이든 인맥이든 무엇인가를 어떻게 더 사용해서 그를 살렸을까.
사실 답을 알고 있다.
최근 들어 그가 그리워지면서 내가 성숙해져 가는구나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인지가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