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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살고 보자. 누가 살고 싶어 하는 거지?

마음속에 난가? 그러려면 바닷물이라도 마시자

by 감자돌이

그녀.


공부한다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순 없었다. 꼭 생색내는 것 같았다. 많은 빚도 있었고 그녀 먹고살기에 힘들었기에 이해했다.

나에겐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에겐 남편이었고 그의 전성기부터 죽음까지 그의 삶 일부분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받은 정신적 충격이 거셌다.

그녀를 이해했다.


그가 죽은 다음 그년 술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년 그가 살아있을 시절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었다. 술을 싫어하셨다. 그런 그녀가 결국엔 술에 입을 데는 걸 보니 나약해 보였고 그년 현실부정과 더불어 자기 선택과 판단을 후회했다.

보는 내가 슬펐다. 악재가 겹쳐서 일어나니 당혹스러웠다.

처음엔 그의 탓을 했다. 난 이 모든 걸 좋게 바꿀용기가 없다고 해결방법을 제시해 달라고 빌었다.

여기서 나의 머릿속 가상의 인물 "신"을 더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1년 전과 같지만 더 강하게, 나의 모든 걸 바칠 테니 한 번만 모든 걸 바꾸게 해달라고.

다른 건 손도 안 댈 테니 가족에 관한 것만 좋게 바꿀 수 있는 신. 그런 신이 되고 싶었다.


그년 딱해 보였다. 실적으로 내가 바라봐도 가여웠다. 결국 그도 죽고 아들인 나랑은 연을 끊고 살아가고 누난 돈 때문에 싸우고 연락두절이니 그년 힘들어했다. 남은 게 없다고 어둠에 절어 부정에 갇히셨다. 내가 다시 그녀의 얼굴에 생기와 밝음을 보고 싶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기 힘들 거라는 거 그리고 무리하면 내 건강이 나빠질 거 엔딩이 새드 엔딩이더라도 그녈 위해 난 미래에 투자했다.

정확히 말하면 약속 지키는 거에 성공한 미래. 꼭 약속을 지켜 다시 그녀와 누나를 회복시켜주고 싶었다. 그러기엔 최대한 민폐를 안 끼치고 내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난 여기에 충실했다.

누구보다 약속에 충실했다


모든 걸 내가 결정하고 책임도 내가 졌다. 년가장이었으니깐.

단어가 조금 별로라서 난 소년가장 대신에 애기아빠라고 바꿨다. 아기를 낳은 아빠가 아니라 이른 가장이 되기엔 미성숙한 애기의 그 애기였다.


문제를 푸는 양이 가지고 있는 양을 초월했다.

하루에 문제지가 쓰레기장에 몇십 개씩 버려졌다.

선배들이 버리는 문제집을 많이 주웠다. 운이 좋으면 유명한 문제지나 어려운 문제지를 구할 수 있었다. 재밌었다. 다양한 문제가 있구나, 이 사람은 이걸 이렇게 풀었구나. 신기했다. 록 새 문제집은 아니지만 좋았다. 눈으로 쓱 풀고 다른 사람의 고민, 풀려고 시도해 봤던 방법들 포인트 전부 다 흡수했다.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내가 1등이다.

다 날 지켜봐라.

정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의 에너지를 뺐을게.

미안해. 이건 정말 미안해.

어쩔 수 없어.


공부 잘한다고 인기가 많다고 잘생겼다고 어떠한 조건에 주변의 관심이 많고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정작 랑을 못 받고 자랐으니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었다. 부수적인 목적에 의해 날 좋아하는 그런 거 말고 순수한 사랑, 그걸 주는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다만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난 의미마저 정확히 몰랐다.


외로움에 미쳤다. 난 남들의 에너지와 자존감을 박살 내며 나의 자존감을 채우는 길을 택했다. 바닷물을 마시는 거란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면 안 되었는데 뼈저리게 후회를 했다.


망나니 자아의 시작.


나의 외모와 지능, 실력, 피지컬을 가지고 사람들을 기만했다. 인성이 더 안 좋아졌다. 생님이든 어른이든 친구들이든 기만하고 까내렸다. 마치 내가 우월한 사람이란 듯이 나르시시즘에 걸렸다. 뭐든 할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 당시 다 이뤄왔으니깐. 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느덧 난 스펙지상주의가 되어있었다. 우리 집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날 엄친아로 불렀다. 물론 지금 친구들과 그 시절 얘기를 하다 보면 내가 나르시시즘에 걸릴만했다고들 하나 핑계겠지만, 저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정말 자살 혹은 못된 마음을 먹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같잖은 핑계 속 남을 기만한 죄. 그게 남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내 전성기가 그 정도였나 싶다. 이젠 안다. 그 잘난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 그리워하며 갇혀살필요도 없고 더 나은 발전한 시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마디로 현실 안주 그리고 행복 추구.


스승님이 보기엔 딱했을 것이다. 난 사실 겁쟁이였다. 엄청 무서워지고 두려우니 자길 포기했고 주체도 빼앗겼으며 나약해졌다. 아직도 문득문득 그냥 버스에 치일까 생각한다. 디 나약한 생각이 뇌를 떠나기를.


논리가 웃겼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자. 더 열심히 하자. 이래서 얻는 게 뭐지. 너무 힘들다. 쉬고 싶다. 죽을까. 못 멈추겠는데. 그냥 막살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고 싶은 대로. 아니다 그래도 죽더라도 차라리 열심히 하자 죽자.


망나니 자아가 날 어삼켰다.


잃을 게 없고 자신을 포기한 지 오래라 막살았다. 실질적으로 삶을 막살진 않았지만. 범죄나 크게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피해가 안 가는 짓? 물론 나의 일방적인 사고일 수도 있다. 열심히 사는 망나니?

끝없이 사람들의 자존감을 뺏어먹었다. 맛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수능 끝나고 깜짝 의 실력을 공개하려 했지만 결국 내 입으로 자랑을 했다. 자랑 안 하기로 마음먹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하지만 쭉 숨길 순 없었다. 어느덧 나의 실력은 선생님들과 깊은 토론을 하고 비평을 할 정도가 되었다. 선생님들이 봐주셨다. 너무 티가 났다. 근데 그땐 내가 그들보다 정말 뛰어난 줄 알았다. 그때 스승님께서 본인이 선생님이 되기 위해 쳤던 수학논술을 주셨는데 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선생님들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하나. 그들은 진짜 최고 중의 최고니깐, 공부가 재밌었다.


아빠가 늘 말했다. 우리 집의 남자들은 세대를 걸칠수록 부모가 가장 부족했던 단점을 고치고 태어난다고, 아마 난 공부겠지 생각했다.

가끔 여자친구와 애기 이야기를 한다. 어느 정도 내 과거와 인생을 아는 여자친구는 내 아들은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부족했단 날, 공허했던 날 사랑해 준 여자친구에게 고맙다.


그저 더 열심히 해서 다 이길 거라고 다짐했다. 학교 1등에서 멈추지 않고 대구시 1등 경상북도 1등 전국 1등. 국이란 산 위에 나의 이름을 꼽겠다고.

운동선수였을 때보다 더 높게 올라갈 거라고.


가을이었다. 내가 태어난 계절이었다. 가족한테선 연락이 없었다. 하긴 어떻게 연락하겠는가. 폰도 없고 되게 안 좋게 헤어졌는데. 폭력, 욕설, 돈, 싸움. 뭐 하러 연락하는가.


오히려 학교친구들과 선생님께 축하와 선물을 많이 받았다. 행복했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곧 몇 개월 뒤면 2학년이었다.


그럼 어떤가. 이겨내야지.


어느덧 학교에선 날 대단하다고 추앙하는 그룹과 날 싫어하고 까기 시작하는 그룹으로 나눠졌다.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그리고 학부모들까지도. 난 어느덧 화제인 인물 문제아가 되어버렸다.


악담이 들렸다. 부모 잘 만났으면 대성할 거라는, 부모가 얘 앞길을 막는다고. 거지라고 돈이 없냐고, 많이들 들었다. 대놓고 들리는 뒷담. 굳이 날 깔필요가 없는데 가진 거 없는 나보다 자존감이 낮은 학우들은 존재했다. 신기했다. 쟤들은 뭐가 불평불만인 걸까.

내가 먼저 자존감을 뺐고 기만해서 그런가. 등가교환이었고 까일만했다. 내가 먼저 깠으니.

그래도 따뜻한 집에서 자고 밥도 먹고 죽음도 없고 빚도 없고 그런데 왜 남을 까는 걸까. 내가 그렇게 아니꼬운가.

난 저런 말을 하는 학부모들과 학생들과 싸웠다. 학생들과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다. 날 욕하는 건 좋았지만 그녀와 그를 욕하는 건 귀에 거슬렸다. 선이라는 건 지켜져야만 했다.


난 지는 걸 싫어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누구 밑에 꿇는 걸 싫어했다. 자존심이 엄청 강했다. 거지는 아닌데 곧 돈을 많이 벌거라고 했다.


저 말이 듣기 싫어 돈을 벌 궁리를 했다. 과외를 해서 벌까? 게임 대리를 해서 돈을 벌까? 해킹을 해서 돈을 벌까?


결국 셋 다 했다. 내 공부실력은 세간에 알려진 김에 중학생들을 가르쳤다. 은근 난 설명을 잘했다. 그 사람에 맞게 이해할 수 있는 예시를 들었다. 나도 처음부터 공부를 잘했던 게 아니라서 더 공감가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가르쳤다.


게임은 오히려 좋았다. 왜 다들 게임하는데 시간이 아깝다고들 생각하지 않는가. 나도 그러했다. 프로게이머란 직업을 하진 않았지만 프로게이머가 양지의 직업이라면 대리기사는 음지의 직업이었다. 남의 아이디를 가지고 게임을 이겨서 돈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어찌 보면 나쁜 행위였다. 뭐 나한텐 피시방 가는 김에 내 아이디도 없는데 갈 때마다 대리를 했다.

해킹은 글에 적진 않겠다. 아직 적을 용기가 나지 않을뿐더러 이건 나쁜 짓이다. 이건 고3 때 이쪽 계열을 준비할 때 다시 이야기해 보겠다.


쉬고 싶었다. 그만하고 사라질까. 내가 모든 짐을 짊어지는 게 맞나. 잘 가고 있는 건가.


항상 뇌에서 유혹했다. 너 이 정도면 잘하는 거야 안주해도 괜찮아. 천천히 하자. 그럴 순 없었다. 내가 쉰다면 평생을 쉬지 않고 달려왔던 그에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혼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날 가두고 강하게 통제와 억압했다. 불안함은 신체로 드러났다. 피로 물든 손, 붕대 데이밴드, 과각성상태. 항상 예민했던 신경들.

다 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열심히 하진 않았다고 생각이 들지만 아마 내 딴에는 열심히 한 것이었다. 정신이 불안정하고 하도 산만하여 앉아있기도 힘든데 몇 시간씩 앉아 있고 그랬다. 1년 만에 이과에서 1,2등을 다투는 학생이 되어있었다. 소문은 건너 건너 어머니에게도 들렸고 마을 분들과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날 천재라고 불렀다. 왜 진작에 공부하지, 왜 운동을 했냐라는 말씀도 하셨다.


3월에 5등급 정도인 학생이 혼자 독학으로 99.6을 찍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런가. 스스로 자문자답했다.

전혀 아니다. 이 당시엔 저 숫자가 세상의 전부고 공부가 전부였다. 정작 중요한 대인관계를 챙기지 못했다.


요새 입시열풍 때문에 개천에서 용 나는 게 힘들다던데 하시면. 난 매번 내가 될 거라고 다짐했다. 날 까는 사람들이 날 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난 더 강해졌고 성장했다.


공부에 미칠수록 수많은 강박증과 각성 불안장해 수면장애가 발생하고 감정을 잃은 채 자존감과. 자만심에 취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남들이 날 치켜세워주니 코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다.


신체에 부담이 가기 시작했다.


저렇게라도 억지로 생각해야 하루하루가 살만했다. 내심 두려웠다. 몸이 이상해져 가는 걸 인지했다. 잠을 안 잘 때에는 1주일에 4시간정도 자고 아닐 땐 수업시간에 쪽잠은 잤다. 밤에 무서웠다.


기숙사에서 다 같이 자지만 무서웠고 두려웠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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