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민호는 신호대 앞에서 보행자 신호가 빨간불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만해도 별밤 책방에 가는 것이 무의미했으며 긴 신호는 왜 그렇게 짜증이 나고 싫었는지 몰랐다. 이제는 긴 신호마저 즐겁고 가는 길이 설레기도 했다. 민호는 분명 바뀌고 있었다. 민호가 바뀌는 속도에는 못 미치지만 분명 별밤 책방도 바뀌고 있었다.
우회전만 하면 별밤 책방이다. 보행자 신호동의 초록불이 깜빡이면서 10.9.8 카운트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는 따라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7초쯤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이 백발을 휘날리면서 쏜살같이 건너갔다.
"앗~ 저 사람은?"
가끔 별밤 통창을 통해 민호와 눈이 마주친 사람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그냥 돌아서서 가버렸다. 괜히 반가웠다. 민호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빵~~"
뒤차가 신호 바뀠다고 빨리 가라고 "빵~"거렸다. 민호는 미안함에 비상 깜빡이를 깜빡여줬다.
그렇게 백발을 휘날리며 뛰어간 사람은 별밤 통창 앞에서 양손을 이마 위에까지 올려 차양을 만들어 가게 안을 염탐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는 이 사람이 궁금해졌다.
분명 머리카락은 백발인데 얼굴은 또래처럼 보였다. 민호는 조용히 그 사람 옆에 서서 양손으로 큰 원을 만들어 얼굴에 가져다 대면서 안을 쳐다보는척했다.
"뭐? 봐요?"
그 사람은 민호의 한마디를 듣고서 놀라고 민우를 쳐다보고는 한 번 더 놀라서 뒤로 휘청거렸다.
"어... 어.."
"아이고~ 괜찮아요? 놀라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민호는 괜히 미안함에 사과를 했다.
그 사람은 양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했다.
"아.. 아.. 닙... 니.. 다. 작.. 가.. 님.. 이.. 시.. 죠?"
"작가요?'
민호를 작가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시원한 커피라도 한잔하시죠."
"그.. 게.."
뭔가 말하는 게 어눌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어눌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들어갑시다."
민호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는 한참을 힘을 줘서 이리저리 돌렸다.
몇 번을 돌려서야 딸깍하고 열렸다.
"앉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민호는 가게에서 최고의 상석에 그 사람을 앉혔다.
상석이라 해봐야 다른 자리 보다 조금 시원하고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곳이다.
민호는 가게 실내조명이라는 조명은 다 켜고 , 도라에몽 머리에 달린 프로펠러처엄 작고 귀엽게 생긴 천장실링팬을 켜고, 에어컨을 켜고, 컴퓨터를 켜서 음악을 틀었다.
민호는 별밤 문을 연지가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도 어리바리하게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이 괜히 부끄러웠다.
"시원한 커피 한잔 줄까요? 아니면 시원한 500CC 한잔 드릴까요?"
민호는 오른손 손목을 살짝 꺾으며 한 잔 마시는 시늉을 했다.
"괜.. 찮.. 아.. 요"
그 사람은 일어나면서 손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흔들며 민호에게로 다가왔다.
'말이 좀 어눌하구나'민호는 다시 한번 느꼈다.
"작.. 가.. 님.. 저... 이... 거"
그 사람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익숙한 색감과 말 안 듣게 생긴 남자아이들이 보였다. 민호 앞에 쓰윽 내민 건 몇 달 전에 나온 민우의 소설책이었다.
"작.. 가... 님.. 싸.. 인.. 좀?"
"네? 아~ 네~"
민호는 볼펜을 꺼내서 책 앞 페이지를 펼쳤다.
"성함이?"
"그.. 냥.. 봉.. 우.. 라.. 고.. 해.. 주.. 세.. 요. 제.. 가.. 어.. 립.. 니.. 다."
"설마요?"
"진짜예요."
민호는 놀라서 봉우를 쳐다봤다.
봉우는 민호를 쳐다보며 놀라는 걸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가님.. 77년생이시죠?.. 전 89년생입니다."
"설마?"
민호는 또 한 번 더 놀란 표정을 감추가 없었다.
봉우는 억울함을 많이 당해서 익숙한지 서슴없이 신분증을 민호 앞에 꺼내서 보여줬다.
그러니깐 민호는 77년생 뱀띠이고 봉우는 89년생 뱀띠다.
"근데 내 책인 것을 어떻게 알았죠? 우리 가게에서 사신 것 같지는 않은데?"
"네. 저.. 이 책 나오자마자 예.. 약 판매할 때 샀어요."
"그래요? 저를 알고 샀나요?"
"네."
"어떻게?"
민호는 봉우가 12살이나 어리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그거는.. 나.. 중에 말.. 씀 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봉우가 말을 조금 더듬어도 좀 전하고는 확연하게 달랐다. 말이 조금 느리게 들려도 더듬는 것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민호는 신기한지 봉우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 눈빛의 뜻을 바로 알아챈 봉우는 미소로 답했다.
"아.. 말 더듬는 거요? 긴... 장하거나.. 처음 본 사람하고 이야기하면 심하게 더듬어요."
"그래요? 그럼 지금은 편해요?"
"네.. 신기하네요. 금방 편.. 해.. 지네요."
"다행이고 기분이 좋네요. 편하게 대해줘서."
민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몇 달 만에 다시 펜을 들어 사인을 해줬다. 석 달이 지나서야 사인을 받았지만 봉우의 표정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봉우 씨~ 우리 언제 한잔해요. 별밤 책방! 여기서 언제든지 한잔해요."
"진짜요. 우와 진.. 짜.. 한잔해요. 그리고 봉우라고 불러도 돼요. 아니면 친구들처럼.. 그냥"뽕"이라고 불러도 돼요."
"하하 나중에 편해지면.."
"네. 그럼 오.. 늘은 그냥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봉우는 책을 가방에 넣고는 정수리가 다 보일 정도로 배꼽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민호는 백발의 뒷모습을 보고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친구가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뽕~~ 꼭 한잔 하려 와!"
봉우는 나가려다 돌아서서는 손바닥이 반 이상 보이는 어설픈 거수경례를 하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