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민호가 별밤책방으로 출근하면 먼저 출근해서 민호를 반겨주는 이가 있었다. 민호 친구 천이가 며칠 전부터 별밤책방 테라스에 목줄이 묶인 채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민호가 다가가면 점프를 하면서 반갑다고 짖었다.
천이가 별밤책방으로 첫 출근한 날에 김 씨 영감님이 천이 집을 멋지게 지었다. 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집이다. 검은색 페인트로 양산천이라고 쓴 문패가 걸려있다. 천이도 집이 마음에 드는지 편안하게 낮잠을 자곤 했다. 천이는 어느새 별밤책방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별밤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봉우의 억지도 있었다.
민호는 오늘도 어제의 냄새를 보내고 오늘의 냄새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오늘도 별밤책방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방구석에 앉아 모니터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가며 일을 시작했다. 봉우가 온 이후부터는 포스트잇이 많이 붙여있어 봐야 세 개 정도다. 민호가 할 일은 온라인 서점 들어가서 신간 책들 보고 주문하는 일과 책들 서평 찾아보는 일이다.
민호가 고개를 돌려 별밤책방의 벽시계를 쳐다봤다.
"딸~~ 랑" 경종소리와 함께 우렁찬 여자아이의 "안녕하세요."가 들렸다.
가을이다.
"어서 와요."
"근데요? 사장님~ 근데 밖에 강아지요?"
"강아지? 아~ 천이?"
"아저씨가 주인이에요?"
"음~ 주인 아니고 사장이지요."
"네? 뭔 소리?"
"내가 천이 사장이지요. 며칠 전부터 천이가 별밤책방으로 출근했거든요. 저녁에는 퇴근해요. 하하하"
".... 그냥 아아나 한 잔 주세요."
가을이는 개그도 아닌 민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가을이는 직접 검열을 마친 제일 편한 쿠션이 있는 자리에 가방을 놓고 책장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민호는 가을이 옆에 서서 살며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근데 이런 거 물어봐도 될까?"
민호는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가을이는 말 놓은 게 불만인지 뭘 물어본다는 질문이 불만인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내밀고는 쳐다봤다. 가을이는 기분이 좋아도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몇 학년이야?"
"네? 무슨?"
"학생 아니야? 무슨 과야?"
"하하하 저 졸업했어요. 지금 백수 1년 차예요. 다르게 말하면 취업준비생, 평일오후에는 아르바이트생이고요."
"아~ 그렇구나 나는 이제 대학교 1학년쯤으로 봤는데 미안해요."
"고맙습니다. 사장님도 아니 작가님도 어려 보여요. 우리 미순 씨가 그러는데 내일모레 50이라면서요?"
"네네.. 고맙습니다. 근데 어디서 아르바이트해?"
"사장님. 말을 놓으려면 놓고 높이려면 높이세요. 그게 뭐예요?"
"음... 그럼 말 놓을게."
"편하신 대로요. 저 별밤책방 경쟁업체에서 아르바이트해요."
"무슨? 근처에 책방 생겼어? 책방에서 일해?"
"하하하 그게 아니고 저기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별다방에서 일해요. 같은 별이니깐 경쟁업체죠. 커피도 파니깐."
"경쟁은 무슨. 그리고 가을이도 호칭을 확실하게 해. 사장님이면 사장님이지 작가님 했다가 아저씨 했다가."
"네네.. 근데요 화났어요? 작가님."
"화는 무슨? 그리고 작가님은 별로다 그냥 아저씨로 하자."
"나는 작가님이 좋은데. 알겠어요. 아저씨."
민호는 이렇게 가을이 한테 옆집 아저씨가 되었다.
"근데요~~ 아저씨~ 저 책 좀 골라줘요. 읽을 책을 못 고르겠어요."
"내가 전에도 이야기했을 건데. 가을이 스타일을 모른다고?"
"사실은 제가 책하고 담을 쌓았는데요. 미순 씨도 그렇고, 주변에서 너도나도 책을 읽는다고 하고, 책 좀 읽으라고도 하는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저씨는 책방 주인인데..."
가을이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면서 "제발~"하면서 양손을 모아 빌었다.
민호는 눈으로 이미 가을이에게 권할 책을 확인하고는 뜸을 들었다.
"자~ 이거 읽어봐. 가볍게 읽다 보면 재미있을 거야."
"-구덩이- 제목이 왜 이래요? 일단 고맙습니다."
민호는 가을이에게 루이스 새커의 '구덩이'를 권했다. 민호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책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될지 모를 때는 이만한 책이 없다. 청소년 문학이라 해도 민호는 어떤 소설책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별밤책방이 조용해졌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민호는 주방에서 모니터 사이로 가을이를 힐끔 쳐다봤다. 가을이는 입꼬리가 올라간 채 책을 보고 있었다. 책 속에 빠진 거다.
민호는 별밤책방의 시계를 쳐다봤다.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딸~랑"의 경종소리가 별밤책방의 침묵의 온도를 차갑게 만들었다.
"아저씨~아저씨~ 안녕하세요."
우진이가 문 앞에 서서 인사를 하고는 들어왔다. 통창 밖으로 김 씨 영감님이 민호를 보고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진이는 가을이가 앉아 있는 자리 앞에 섰다.
"우진이 우진이 자리. 우진이 자리"
우진이가 가을이 앞에 서서 자기 자리다고 비켜달라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가을이는 우진을 한번 쳐다보고는 민호를 쳐다보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민호도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진이가 늘 앉던 자리가 맞다. 가을이 자리이기도 맞다. 가을이는 다시 한번 우진을 쳐다보고 민호를 쳐다봤다. 민호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좌측으로 돌리면서 가을이에게 양보를 부탁했다. 가을이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우진이는 자연스럽게 책장으로 가서 책을 골라서 자리에 앉았다.
가을이는 양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팔꿈치 위에 턱을 올린 채 우진이를 쳐다봤다,
"안녕~ 나는 가을이 누나야."
우진이는 가을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배꼽에 손을 갖다 대고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진이 우진이 13살 13살."
"야~ 앉아, 앉아."
가을이는 우진이의 팔을 잡고 자리에 앉혔다.
"우진이 무슨 책 읽어? 누나가 봐도 돼?"
가을이는 우진이가 읽는 책을 보고는 입을 벌린 채 민호를 쳐다봤다. 분명 말소리는 안 들렸지만 입모양은 확실했다.
"애~ 뭐예요?"
민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올렸다를 반복했다. 가을이는 가방에서 곰돌이 모양의 젤리를 꺼내어 우진이에게 주었다.
"누나 갈 거니깐 이거 먹어. 그럼 다음에 봐."
우진이는 또 벌떡 일어나 배꼽에 손을 올리고 인사를 했다.
"누나 누나 고맙습니다."
가을이는 우진이의 앞머리를 손을 살짝 쓰다듬고는 민호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저 애 뭐 읽는 줄 알아요?"
분명 또 말소리는 안 들렸다. 그런데 입모양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민호는 가을이를 따라 입을 크게 벌리면서 물어봤다.
"뭐 읽는데?"
"상실의 시대요."
"뭐?"
"상실의 시대요."
민호는 별로 놀랍지 않다. 민호가 놀라지 않자 가을이는 또박또박 말을 했다.
"아니 어떻게 '상실의 시대'를 읽을 수 있어요? 아~ 자존심 상해."
"하하.. 갈라고?"
민호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야죠. 별밤에서 별다방으로 갑니다."
"그래 수고하고 다음에는 미순 씨랑 같이 한번 와."
"네. 안 그래도 꼬시고 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문을 열고 나간 가을이가 다시 문을 열고 머리만 내밀었다.
"아저씨~ 오늘 책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빌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