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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새로 시작할 용기가 필요해요.

1-10

by 꾸니왕

봉우는 민호를 보내고 냉장고의 냉장실에 있는 식자재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개봉조차 하지 않은 양념도 있었다. 그만큼 별밤책방이 장사가 안된 듯했다. 사실 장사 안 되는 것을 봉우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별밤책방을 지나갔고, 각종 SNS에도 별밤책방을 검색해도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봉우는 갑자기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봉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제는 누구보다도 익숙했다.

봉우는 민호가 가져다 놓은 자기 자리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나는 괜찮다."

봉우는 주문 외우듯이 중얼거리고는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입을 100원짜리 동전이 들어갈 정도만 오므려 길게 천천히 내쉬었다. 그렇게 두세 번 반복하니 조금 안정이 되며 호흡이 돌아왔다.

그런데 봉우는 신기하게도 설레는 감정이 불안보다 더 많이 느껴졌다.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거리는 것이 희망인지 꿈인지 모르겠지만 꿈틀거려 금방 자랄 것 같았다. 봉우는 냉장고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봉우에게 냉장고 정리 정도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냉장고 안의 식자재와 각종 양념이 들어있는 용기를 크기. 색상, 종류별로 분류하고, 최대한 대칭적이고 균형 잡힌 배열로 마무리를 지었다.

봉우는 신간책들을 한 권 한 권씩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다 봉우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는 양념이 든 용기통 두 개를 삐딱하게 흐트러 놓았다. 너무 완벽하게 정리해 놓으면 괜히 민호가 자기의 정리강박증을 걱정할 것 같았다.

물금역 역사와 철도 위 다리가 조명에 환하게 물들어 있었다. 조명이 부드럽게 다리를 감싸고 있는 듯 보였다.

"우와~ 다리가 진짜 이쁘네요?"

"그렇네요."

다리 위에서 본 황산공원은 정말 넓고 곳곳에 조형물에서 비치는 불빛은 마치 보석 같았다. 푸른 나무와 강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두 사람 앞 중앙을 천이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면서 길을 안내했다. 분명 천이도 처음 왔을 것이다.

"그런데 민호 씨는 부산 사람이라면서 여기를 처음 와 봤어요?"

"네~ 바로 옆이라고 해도 여기는 처음 와 봤네요. 근데 제가 부산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사투리도 잘 안 쓰는데?"

"아~ 봉우 씨가 말했어요. 그리고 민호 씨 사투리 써요. 하하"

"봉우가요?"

"네~봉우 씨는 민호 씨에 대해 모르는 게 없던데요. 민호 씨뿐만 아니라 별밤책방에 대해서 다 알던데요."

"네? 설마요."

두 사람은 하트모양으로 되어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제아는 양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하며 괜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민호 씨~ 고마워요."

"네? 뭐가요?"

"전부 다요. 민호 씨 아니었으면 아직도 울고 있었을 거예요."

"네?"

제아는 오른손 검지로 눈가에 어느새 맺힌 눈물을 툭툭 털었다. 그러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민호 씨~ 마마보이 아시죠? 저는 심각한 마마걸이었어요. 한 번도 엄마말을, 엄마 결정을 안 따른 적이 없었어요. 심지어 생리대도 엄마가 쓰라는 것만 썼어요. 학교는 물론 과도 엄마가 결정해 준 대로 갔고요. 취직도 엄마가 정해준 회사에 했어요. 한심하죠?"

"....."

민호 말 대신 괜찮다고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더 황당한 이야기 해줄까요? 엄마가 결혼하라고 한 남자와 결혼을 했어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게 행복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불행하지는 않았어요. 남편도 저한테 잘했고요. 그런데 올해 초 이혼하라고 하는 거예요."

"왜요?"

"몇 년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아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남편에게 문제가 있었어요."

"...."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 말을 듣고 이혼을 했다는 겁니다. 미쳤죠?"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큰 마음먹고 도망을 쳐서 양산으로 왔죠. 그러면 뭐해요. 매일 엄마 전화에 울면서 답하고는 오라면 가고 가라면 왔죠. 정말 살기 싫었어요. 그렇게 매일 살기 싫다고 양산천을 걸었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천이가 나를 뒤따라오는 거예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천이와 살게 되었죠."

"아~"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이가 그날 별밤책방으로 끌고 안 갔으면.."

"그러게요 저한테 고마울게 아니고 천이한테 고마워해야죠."

민호는 천이의 등을 긁어줬다.

"천이도 고맙죠. 그래도 매일 엄마의 전화 때문에 그리고 피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너무 괴로웠어요. 근데 정말로 민호 씨가 권한 책들이 나를 바꿨어요."

"에이~ 그래도 제아 씨의 의지가 있었으니 그렇죠."

"왜요? 마음에도 피가 난다고 했잖아요. 약은 약사에게 책은 민호 씨에게 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왜 약한 모습? 정말 상처를 치료해 주고 영양제까지 줬어요."

"하하 그래요. 사실은 제가 천이와 제아 씨에게 감사하죠. 그건 그렇고 우리 그만 갑시다. 봉우도 걱정되고."

"맞다. 책방. 저는 제가 쉬어서 민호 씨도 쉬는 거라고.. 하하.."

"하하.. 쉬는 것 맞죠, 책방에서 매일 쉬는데요."

"아! 그리고 저 축하해 주세요. 이 말을 못 했네요. 저 취직했어요. 원래 프리랜서로 일했는데 회사에서 내일부터 정식으로 일하제요."

"이야~ 축하해요. 오늘 축하 파티해요."

"안 돼요. 내일부터 출근해야 된다니깐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요?"

"천이 때문에요. 제가 프리로 일할 때는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괜찮았는데 혼자 집에 놔둘 생각 하니 걱정이네요."

"그게 무슨 걱정이에요. 제아 씨 출근할 때 별밤책방에 두고 가세요. 책방 테라스에 천이 집도 놔두면 되겠다."

"아. 정말로 그렇게 해도 돼요? 괜찮아요?"

"괜찮죠. 저야 좋죠."

천이도 어쩌면 이제 민호와 더 오래 시간을 보낼 것을 아는지 별밤책방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민호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도착했네요. 올 때는 금방이네요."

"그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민호는 급하게 내려서 책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간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민호는 한 손에 책을 들고 나왔다.

"자~ 입사 선물이에요."

제아는 뜻밖의 선물을 받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했다.

"고마워요."

"들어가요. 천이도 안녕~"

민호는 빨 리가라고 손짓을 했다.

제아의 한 손에는 '그녀 이름은'이라는 조남주 님의 소설책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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