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는 겨울이의 눈초리가 자꾸만 종아리부터 온 몸을 때리는 것처럼 따끔거려서 자리를 피하기 위해 피신처로 가려는데 경종이 "딸~랑"울렸다.
"안녕하세요."
"가을이 누나다. 가을이 누나다."
민호가 인사도 하기 전에 가을이의 "안녕하세요"인사와 우진이의 "가을이 누나다." 가을이를 반기는 소리가 동시에 들렀다.
"가을아...."
민호는 무슨 말을 하려다 우진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말을 참았다.
우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며 손뼉을 치면서 가을이에게 다가왔다. 배꼽에 손을 올리는 것은 잊을 만도 한데 꼭 배꼽에 손을 올려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가을이 누나. 가을이 누나."
"응~ 우진이도 안녕~"
가을이도 우진이의 앞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닿을 듯 말 듯 쓰다듬으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우진이는 가을이 손을 잡고 자기 자리로 끌고 갔다.
"가을이 누나 여기 앉아 앉아."
가을은 당황한 눈빛을 자꾸 민호와 겨울에게 보냈다. 민호와 겨울은 고개를 돌렸다.
"우진이 무슨 책 봤어?"
"사피엔스. 사피엔스. 우진이 사피엔스 사피엔스 읽었어."
"...."
가을은 우진이가 읽고 있던 '사피엔스' 책을 한 번 보고 민호 쪽을 쳐다봤다.
"우진아 누나 누나동생하고 이야기 좀 하고 우진이한테 다시 올게."
"네. 네.. 우진이 우진이한테 올게 올게."
우진이는 손뼉을 쳤다. 민호는 우진이가 기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자기에게 가을이가 다시 온다는 말에 기쁘다는 것을 민호는 알고 있었다.
가을은 다시 한번 우진이 앞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민호와 겨울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왔다.
"가을아~ 너.. 너는 또 왜 머리를 잘랐어?"
"머리를 자르다니요? 머리카락이죠? 작가님이 어이구~"
"그.. 그래 미안 그래 머리카락은 왜 잘랐어. 혹시 너도 고백포기했어?"
"뭐래요. 고백할 남자도 없거든요."
"그런데 왜?"
"겨울이가 자르고 왔는데 이뻐서 따라 했어요."
"...."
민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 쌍둥이는 원래 그래요."
"그래."
"그리고 아저씨~ 고맙습니다."
"뭐가?"
가을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민호에게 건네주었다.
"아저씨가 읽으라고 주신 이 책 읽고 마음을 다시 잡았어요. 제가 많이 노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뭐를?"
"그거는 제가 나중에 말해줄게요."
겨울이가 민호 손에 있는 책을 낚아챘다.
"일만 번의 다이빙"
겨울은 '일만 번의 다이빙'책과 자기에게 권한 책'두 늙은 여자' 책을 양손에 들고는 번갈아 보고 민호를 또 째려봤다. 민호는 겨울이와 가을은 분명 쌍둥이가 맞다는 것을 느꼈다. 다르지 않았다. 표정부터 말투까지 다 똑같아졌다.
겨울은 다시 입이 쭈욱 튀어나왔다.
"아저씨! 저도 이런 말랑말랑한 청소년 소설이 읽고 싶어요? 왜 저한테는 '두 늙은 여자' 제목부터가 늙은 책을.."
"아니야 읽어봐 그거 엄청 재미있고 힘이 생길 거야. 좀 전에 아저씨가 말했잖아."
가만히 있던 가을이가 '일만 번의 다이빙'책의 표지를 다시 훑어봤다.
"그런데 아저씨 이거 청소년책이에요?"
"응.."
"아저씨! 제가 아무리 책을 안 읽었다 해도 저한테 청소년책을 읽으라고..."
"가을아~ 아저씨도 그 책 엄청 재미있게 읽었어, 그리고 두 번이나."
가을은 민호의 말을 듣고 조용했다. 민호는 그 타이밍에 그 자리를 벗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흔들었다.
가을은 우진이 맞은편에 앉아 30분을 같이 이야기도 하고, 책을 읽고, 겨울이와 같이 별밤책방을 나갔다. 우진이는 오늘도 고스톱을 치고 오신 김 씨 영감님 손을 잡고 별밤책방을 나갔다.
민호는 아무도 없는 별밤책방의 벽시계를 봤다. 별밤책방의 벽시계의 초심은 잠시 멈춘 듯했다. 민호는 천이를 교육시킨다는 명목아래 기다려! 엎드려! 일어서! 외쳤다. 천이는 민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는 아무 행동은 하지 않고 대답만 했다.
별밤책방 주변에는 "엎드려!"와"멍 멍" 소리만 울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도 사람이 개소리를 배우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딸랑"경종소리가 짧다.
봉우다. 봉우의 출근 경종소리는 짧다.
민호는 벽시계를 봤다. 별밤책방 벽시계의 초심이 '딸깍'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우는 주방에 들어오면 손을 씻고 냉장고 문을 열어 식자재 파악을 하고 오늘 쓸 야채를 다듬는 일부터 한다. 야채를 다듬고 주류 냉장고 앞에 서서 맥주병들을 오와 열을 맞춘다. 한치의 흩트럼없이 맞추고는 마지막에는 꼭 한 두병은 일부러 흩트러 놓는다.
봉우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수첩을 펴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면 민호는 책장 앞에 서서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스쿼트를 시작한다. 스쿼트를 10개쯤 하면 천이의 짖는 소리가 들린다.
별밤책방의 벽시계는 정확했다.
제아가 퇴근하고 왔다.
천이가 반갑다고 짖었다. 천이는 하루에 두 번 짖었다. 민호가 별밤책방에 출근하면 짖고, 제아가 퇴근해서 별밤책방에 오면 짖는다.
제아가 통창 너머로 천이를 안고 있는 게 보였다.
"봉우야~ 산책 갔다 올게."
"네. 다.. 녀 오세요."
민호는 천이의 목줄을 잡고 앞장세우고 제아와 나란히 양산천 둑길을 걸었다. 민호는 제아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아는 걸으면서 양산천에 비친 불빛을 보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휴~ 좀 살 것 같네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회사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요. 사실은 오늘 그 사람에게 문자 한 통을 받았어요."
"그 사람?"
"전 남편요."
"아~"
""잘 지내?"라는 세 글자뒤에 물음표가 찍힌 문자 한 통을 받았는데요."
"...."
"그런데요. 저 지금 정말 잘 지내고 있거든요. 조금씩 나를 찾는 것 같고, 책 읽는 것도 좋고, 매일매일 좋거든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의 "잘 지내?"이 문자 한 통에 눈물이 와르르 나왔을까요? 지금도 금방 눈물이 터질 것 같아요."
"....."
민호는 대답 대신 '괜찮다. 다들 그래요.'라는 눈빛과 '계속 이야기하세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문자를 받자마자 썼어요."저는 잘 지내요. 당신은 어때요?"라고 썼어요. 그런데 다시 지웠어요. 그리고 썼다 지웠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갑자기 가슴속으로부터 소리 없는 절규가 나오는 것 같았어요, "나 너무 힘들어요."라고요. 그렇게 결국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어요."
"제아 씨 힘들어요?"
"힘든 건지 모르겠어요. 이게 힘든 건지? 그냥 못다 한 빨래가 남았는데 비가 와서 못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이혼을 하기 전날에도 우린 함께 밥을 먹었어요. 그 사람은 자신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내 "미안하다."만 말했어요. 저도 그때는 "자식이 없으면 나중에 힘들고 어떻게든 헤어지게 되어 있다. 일찍 헤어져라."라는 엄마 말만 듣었죠.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거였어요."
"제아 씨?"
"네."
"보고 싶어요?"
제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을 땅만 보고 걸었다. 제아는 결심을 한 듯 긴 한숨을 쉬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도 모른 채 결혼했어요. 아니죠. 아예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랐으니 어쩌면 사랑해서 결혼했는지도 모르죠. 사랑을 해야 보고 싶은 거 아니에요?"
"지금 돌아보니 사랑 같아요?"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여기가 아파요. 너무 아파요. 그 사람 생각하면 너무 아파요."
제아는 명치끝을 주먹으로 두 번 두드렸다.
민호와 제아는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30분을 걸어 양산타워 앞까지 걸어온 그들은 다시 30분을 걸어서 별밤책방이 보이기 시작한 곳까지 돌아왔다.
"제아 씨. 연락해 봐요."
"네? 그래도 될까요?"
"뭐. 어때요. 당장 어떻게 할 거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천천히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 봐요. 저기 저기서 맥주 한잔 할래요?"
민호는 웃으면서 별밤책방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