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3 이별이 너무 아파요.

2-3

by 꾸니왕

미순은 힘겹게 몸을 뒤틀어 10년째 아무도 베지 않은 지석의 베개밑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 속의 내용은 어제와 똑같았다. 심지어 스팸 메시지 하나 오지 않았다. 미순은 몸을 좌우로 비틀어 팔에 힘을 주어 일어나 침대에 기댔다. 등을 살짝 들어서 지석의 베개와 자신의 베개를 포개 넣었다.

미순은 자신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그리고 글을 썼다. 미순은 꿈을 꾸면 그 꿈속의 내용을 되새겨 글을 써서 올렸다. 그러나 그 글은 비공개로 미순이만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미순은 작년의 오늘을 찾아봤다. 작년의 오늘은 비워져 있었으나 작년의 어제는 오늘과 같은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 좀 다르게 나타나면 안 될까?"

미순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그리고 협탁에 고스란히 놓인 책을 펼쳤다.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너의 슬픔이 아름다워 나는 편지를 썼다' 책이다. 며칠 전 꾸니왕의 블로그에 소개된 책이다. 슬픔과 상실을 겪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아내를 잃은 저자가 자기처럼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극복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미순은 자기를 위해 꾸니왕이 이 책을 블로그에 소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미순이의 책장에 꽂힌 책들은 대부분이 꾸니왕이 블로그에 소개한 책들이다.


민호는 제아의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고, 천이를 앞장 세워 혼자 양산천으로 향했다. 30 계단을 다 올라섰을 때는 어제와 다른 바람이 민호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어제와 다른 바람이 분다는 것을 몇몇 사람들은 접했는지 어제보다 산책하는 사람이 줄었다.

바람이 무릎 위로만 부는지 천이는 어제와 똑같이 당당하게 앞장서서 걸어갔다. 민호는 천이의 당당함과 다르게 나라를 팔아먹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이의 목줄에 의해 끌려갔다.

고개를 숙인 채 걷던 민호에게 뒤통수 끝과 뒷목덜미 제일 위쪽 사이에 숨겨 두었던 감정이 우측뇌의 중앙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오래전 사놓고 한 번 입고 장롱 깊숙이 넣어놓고는 모른 채 살아왔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꺼내서 보니 유행도 지난 옷처럼 깊숙이 있던 감정이 갑자기 튀어나와 어울리지 않게 우측뇌의 중앙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 연우에게 들은 이야기가 자극이 되었던 같다. 민호는 지은이와 긴 시간을 연애를 하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둘은 서로만 바라 보고 살기로 했었다. 사랑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살짝 미소가 지어질 때쯤 사랑이라는 감정의 끄트머리를 잡고 따라온 이별이라는 놈이 사랑옆에 붙어서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에 비해 이별이라는 놈은 작았다.

민호는 지은이와의 이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누구의 잘못에 의해서도 아니었다. 민호는 지은이와 헤어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헤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민호의 생각이 정리도 되기 전 민호의 우측뇌에 매서운 칼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그 두 감정은 칼바람을 맞고 다시 자기의 자리로 가는 것 같았다.

"아~ 춥다. 천아 우리 그만 들어가자."

천이는 민호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는지 가던 길을 한번 쳐다보고는 뒤돌아 섰다.

"고마워 천아~ 빨리 가서 새우튀김 먹자." 새우튀김이라는 소리에 천이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별밤책방에 돌아온 민호는 블로그 확인부터 했다. 며칠 전 연우를 위해 올린 '너의 슬픔이 아름다워 나는 편지를 썼다'의 책 소개 포스팅에서 연우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읽었는지 알 수 있는 연우의 흔적은 없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경종 소리와 함께 조금 늘려도 또박또박 인사하는 봉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40대로 보이는 부부와 중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들어왔다.

"편하신 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민호는 눈인사와 함께 응대를 했다.

아빠는 메뉴가 적힌 칠판과 주류 냉장고를 번갈아 쳐다보고, 엄마는 신간 책 매대 앞에서 시집을 들었다 놨다 하고, 딸은 아무 관심 없이 자리에 앉아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가 결정했는지 주문을 했다.

"등심/치즈 돈가스 하나하고요, 새우튀김 하나, 자기는 맥주 뭐 먹을래?"

"아무거나~"

아빠는 다시 주문했다.

"등심/치즈돈가스 하나하고요. 새우튀김 하나 하고요, 맥주는 듀벨 저거 맛있어요?"

"네. 맛있습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민호도 좋아하는 맥주라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 듀벨 2병이랑, 우리 딸은?"

그러고는 딸을 한번 쳐다보았다.

"청포도 에이드" 딸은 딱 한마디 했다.

"청포도 에이드 주세요."

"네"

봉우는 주문을 듣고는 돈가스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다. 민호는 옆에 보조역할이었다.

한참 대화도 없이 먹던 가족들의 대화는 아빠의 "듀벨 한 병만 더 주세요."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봐라. 이봐라. 너그 아빠가 이렇다. 자기는 한 병에 만 원 하는 맥주는 시키면서 내 시집 하나 사달라니깐 다음에 다음에 이란다."

"집에 시집 많다아이가 읽지도 않으면서"

아빠는 괜히 민호를 쳐다보며 웃으면서 대답했다.

엄마는 혼자 구시렁거렸지만 분명 민호와 봉우 귀에는 또박또박 들렀다.

"지는 맨날 술 묵으면서."

봉우와 민호는 순간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 숙여 웃음을 참았다. 민호와 봉우는 각자의 자리에서 가족들의 테이블에 시선과 귀를 열었다.

딸이 자꾸 민호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러고는 째려보듯이 보는 것이었다. 민호와 눈이 마주쳤다. 민호는 두 눈을 윙크하듯이 깜빡이면서 입꼬리로 웃었다.

딸은 그런 민호를 보고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마도 속으로"뭐꼬" 이러는 것 같았다.

아직도 엄마, 아빠는 "시집을 사주니 안 사주니" 하고 있었다.

딸이 한마디 했다.

"엄마! 내가 사줄게 골라서 가져와."

순간 정적이 흘렸다.

"오~ 우리 딸 고마워. 딸밖에 없다."

그렇게 딸은 최고의 딸이 되고, 아빠는 시집 한 권 안 사주는 나쁜 아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음식을 다 먹은 가족은 계산대 앞에서 민호와 마주 보고 쭈욱 섰다.

딸이 먼저 민호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시집 빼고는 얼마예요?"

"응~ 7만 5천 원이네요."

"그럼 시집 포함하면 8만 7천 원이네요."

"네. 그렇네요."

"그럼 한 권 세트 10% 할인하면 78300원이네요."

"아.. 그렇네요."

딸은 호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세장을 아빠에게 주고 나갔다.

민호는 순간 멍했다. 아빠, 엄마도 멍했는지 민호를 쳐다봤다.

"하하하 맞습니다. 한 권 세트 10% 할인해서 78300원"

"네. 아 그런 게 있군요."

민호는 그때서야 알았다. 딸은 자기를 본 게 아니라 며칠 전 가을이와 겨울이가 세트메뉴가 없다면서 책맥세트와 함께 만든 테이블 위에 놓인 -한 권 세트. 신간도서+안주+술 10% 할인- 문구를 보고 계산하고 있었던 거였다.

민호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민호는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사실은 민호도 그립고 아팠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5화2-2. 이별이 너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