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남편이 출근한 지 두 시간 만에 퇴사하고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나 회사 그만뒀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놀라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진 않았다.
딱히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 잘했어~ 이참에 쉬어. 평생 일해야 하는데
지금이 쉴 수 있는 기회야!"
그때부터 남편은 일 년을 쉬었다.
그때 내 상황을 알던 지인들이나 부모님께선
“그걸 그냥 두고 봤다고?”
“걱정도 안 되니?"
하면서 나에게 얘기했다.
당연히 걱정됐다.
우리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는 어쩌지,
더 나은 곳은 있으려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내내 맴돌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컸던 건 남편에 대한 믿음이었다.
남편이 아무 생각 없이 그만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마음속 더 깊이에는
내가 그랬어도 남편은 나처럼 해줬을 거야 그 마음이 있었다.
내가 만약,
“나 좀 쉴래.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랬다면, 남편도 분명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나를 그저 믿어줬을 거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걱정하면서도 남편을 믿을 수 있었다.
믿는다는 건, 걱정을 없애는 게 아니었다.
걱정은 걱정대로, 믿음은 믿음대로
둘을 억지로 섞지 않고 나란히 두는 법을 배웠다.
둘 다 내 마음 한편에 같이 있어도 괜찮다는 걸
그때 배웠던 것 같다.
남편은 잘 쉬었고,
그렇게 일 년이 지나 새로운 곳에 취업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또 이렇게 말했다.
“나 3개월 정도 무급휴가 써야겠어."
남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신
시부모님은 남편에게 뭐라고 좀 하라고 하셨고,
내 상황을 안 직장동료들은 나한테 묻는다.
“화 안 나? 그걸 그냥 둬?”
나는 그때도 웃었다.
걱정도 되고, 믿음도 있고. 둘 다 내 마음에 있었으니까.
내가 화 낼 일도 아니었다.
사실 걱정이란 건,
이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러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감정이다.
하지만 믿음이란 건,
그 걱정 속에서도 이 사람을 기다려줄 수 있는 마음이다.
남편이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건 어쩌면 내 덕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남편도 마음 놓고, 그런 결정을 저지를 수 있는 거 아닐까?
가끔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뒷배가 되어준다는 건 꽤 든든한 일이다.
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남편은 더 가벼워질 수 있고, 나는 그 무게를 껴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어깨가 으쓱해진다.
사실 무게라는 건 함께할수록 더 가벼워지기도 한다.
어느 한 사람이 모든 걸 짊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나눠질 수 있는 거니까.
나는 늘 기둥처럼 서 있다.
가끔 그게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내가 이 자리를 선택했고, 그걸 잘 해내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안다.
누군가는 묻는다.
너는 대체 언제 쉬어? 너도 그냥 하지 마!
나는 그냥 웃는다. 나는 이미 자유롭다.
내가 선택해서 여기 있는 거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무게를 껴안고 산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그 무게를 억지로 나누려 하지 않고
서로 믿어주는 것.
그게 우리가 껴안고 싶은 존재의 무거움이다.
걱정과 믿음은 늘 나란히 내 안에 있다.
그 둘이 함께 있기에, 나는 오늘도 단단하게 서 있다.
그리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사랑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