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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염치로 인해 굿을 하다

(4) 엄마 아버지 자식새끼

by 블라썸도윤

이번 주에 내 결혼기념일이 껴있다. 같이 살던 남편이 지금은 저세상, 시부모님 산소 주위에 뿌려져 이미 산화되었지만 내 혼사 일에 다른 집 결혼식이 있어서 결혼 이야길 해봐야겠다.


좋은 일이나 큰일을 앞두고는 모두 조심들 한다. 축복받는 이날을 무탈하게 잘 넘겨야 해서다.


내가 겪었던 이 희한한 이야긴 누구라도 겪을 수 있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며 난감해질 수도 있어서 옮겨본다.


혼인식 날을 십여일 앞두고서 시삼촌댁의 아들이 논두렁에 쓰러져있고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는 불타 있었다며 회사의 책임자인 남편한테 저 아래 지방 큰시숙이 전화를 했다. 5형제 중 막내인 남편만 내려오라는 급 연락을 받고 열차를 탔다. 그리고서 시신의 감정 결과를 보기 위해 해부하는 과학검사대에 다른 삼촌 두 분과 같이 들어가서 안 봐야 할 걸 다 봤다. 사망한 시점이 새벽 한 시 반이라고만 밝혀졌을 뿐이다.


너무나 찝찝하여 날짜를 미루려다 말았는데 복잡해질까 봐 그냥 예식을 치르게 됐다. 살면서 성질이 난다. 이날이 되면. 시부모가 안 계셔서 인지는 몰라도 애경사는 남편 혼자서 다 감당하여 다니고 큰형을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은 무속인을 신봉하면서 어찌 새 신랑감을 함부로 써먹었는지 눈을 붉혀뜨게한다. 미국의 명배우 찰스브론슨의 콧수염까지 닮으신 시아버님이라도 계셨으면 상의 되지 않았을까?


시누네 아들이 혼삿날 잡아놓자 큰조카 결혼식에 불참한 시누네는 뭐냐고. 그래서 큰 어른들한테 욕을 먹는다.


결혼식을 마치고 시가 어른들한테 이불 한 채씩을 내드리고서 서귀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한복과 양복을 입은 채로 콘베어에서 짐가방을 찾는데 제주공항 도착 4시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옷 가방이 안 보였다. 몸이 후들거린 자정 12시 반이 되어 덜렁 우리 가방을 찾아서 부랴부랴 택시를 잡았다.


나의 신혼은 옛날 정지문 열 때 삐거덕 소리 나듯이 여기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역정 반 지침 반으로 숙소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안 오는 줄 알고 다른 손님을 받았단다. 서귀포호텔의 청소 하시는 아줌니가 이리 대변하시고선 청소도구와 객실 서비스 물품을 잔뜩 보관한 방을 내주셨다.


3박 4일 동안 동그란 제주 한 바퀴를 돌며 제주 마크가 찍힌 수건이랑 귤 박스, 돌하루방 등 선물 사기도 급급했던 건 역시 큰시누의 심부름이었다.


시골로 인사를 가서 신혼여행 가방 문제가 시골 친구들로 인하여 생긴 걸 알게 됐다. 가방은 시골 친구들이 먼저 싣고 김포공항을 출발했으며 우린 사회 친구들 차에 타게 된 것이다. 이렇게 꼬인 것을 시골서 이 친구들이 해명해 주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였다며 미안하다는 말은 않고 좋은 추억거리가 생겼을 거라며 다들 키득키득 웃는데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은 걸 참아내냐고 얼굴이 붉었다. 뻔뻔한,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빈 인사도 못 해주더라. 그때는 김 기사 네비도 없고 유선으로만 전화 통화가 됐을 뿐 삐삐조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통신망이 디지털로 안되고 내 운명이 꼬여서였나보다 자숙을 했다.


첫 살림을 차린 후 남편은 내가 해 간 TV다이 서랍에 나이가 같았던 죽은 사촌 사진을 잔뜩 갖다 놓고 매일 확인을 했다. 그것도 매일 새벽 한 시 반에 술을 진탕 쳐드시고 와서는.


아래층에 세 가구가 살았는데 다들 남편이 이른 시간 정시에 퇴근하는데 신혼인 나는 미련하게 입술 타고 밥 굶다 잠들곤 했다. 이러다 못 살겠다 싶어 바로 이웃에 위치한 시누이 집으로 가서 이실직고했다. 일주일 후 봐둔 무당집을 같이 가잔다. 소개받은 굿 집에서 마른 북어에 실타래를 감아서 우리 내외 속옷과 같이 싸놨다가 갖고 오란다.


돈을 백만 원 넘게 지불하고서 시키는 대로 준비를 하여 주방 다이에 올려놨다. 웬걸 참 희한했다. 아니, 어떻게 이날 6시 바른 퇴근을 하는가. 와서는 왔다 갔다 하니 북어랑 속옷을 인켈 오디오 위에 옮겨놨다. 안심하려는데 틀지도 않던 오디오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잽싸게 손을 놀려 선반이랑 냉장고 위 등 여러 번 굿에 쓸 용품을 이동했다.


저녁밥을 오붓하게 먹고 자는데 어디서 향 피는 냄새가 자욱이 나길래 자동으로 눈을 뜨게 됐다. 어둠이 머문 새벽 네 시! 옆에서 자던 남편의 흰 런닝에서 땀인지 모르겠으나 흰 연기가 나며 자꾸만 무섭다며 내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신혼에 굿을 하게 됐다. 담날 사진들 다 치어 버리고 조용히 지내다 일 년이 넘으니 내향적인 이이는 새벽 한 시 반은 아니지만 술상무가 되어서 술과 손잡고 다녔다.


나는 깨금발로 많이 살아온 것 같다.


푸른 하늘이 반쪽이었던 것처럼.


산전수전 별걸 다 겪은 나는 이제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차 한잔의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고 하늘을 자주 보는 나의 여백을 찾는다. 작은 것에도 감탄사가 나오니 회양목처럼 느림의 미학을 따라간다.


*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데 빨간 단풍잎 하나는 스스로 세워져서 몸을 굽히지 않고 있다. 삶의 철학처럼 말이지 *




사촌 사진이 있던 TV다이는 굿을 하고도 매일 밤낮으로 뚝 뚝 소리가 울어대서 유명메이커 보루네오(그때는 상당한 가격) 제품인데도 현관문 밖으로 밀어놨다. 이날 내 엄지발이 지리게 눌러지더니 시커먼 멍이 들고 결국 발톱이 점점 벌어지다 빠졌다. 코로나처럼 독한 경험을 하게 됐다. 염치없는 노랭이 형제들을 무지 괘씸하게 여기며 차츰 멀어지니 결국은 저절로 안 보고 살게 되어 뱃속이 다 후련하다.


이때쯤 넷째 시외숙모님이 내게 그러셨다. “저 애들이 왜케 지독한가 몰라.”


막내 시누이의 잘생긴 애인도 한 번 전화해서는 “광막이 큰 누이 나이는 어린데 눈빛이랑 말투가 여느 사람 아니네요. 조심하면서 사셔야겠어요.중학생 애들 과외를 시작했다며 막내 시누랑 이별을 하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내게 전했다.


쥐새끼부터 여시에 늑대까지 뱀의 혀를 두른 형제들 틈에서 오지게 힘들었다. 내 가계부를 뒤지고 장 보고 오면 둘째 시숙이 큰 시누이가 내준 우리 집 비상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와 안방에 누워있었다. 이런 것들 외에도 상상이 안 되는 내뱉기조차 소설이 되는 상처들은 비껴갔다. 이 나이 되니 안 볼 것은 피해 가도 되더라. 내게 편애 됐던 고달픔이 남편이 가는 날 눈 녹듯이 삭아졌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여서 추수 감사제의 기도처럼 고개를 숙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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