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내 결혼기념일이 껴있다.같이 살던 남편이 지금은 저세상, 시부모님 산소 주위에 뿌려져 이미 산화되었지만 내 혼사 일에 다른 집 결혼식이 있어서 결혼 이야길 해봐야겠다.
좋은 일이나 큰일을 앞두고는 모두 조심들 한다. 축복받는 이날을 무탈하게 잘 넘겨야 해서다.
내가 겪었던 이 희한한 이야긴 누구라도 겪을 수 있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며 난감해질 수도 있어서 옮겨본다.
혼인식 날을 십여일 앞두고서 시삼촌댁의 아들이 논두렁에 쓰러져있고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는 불타 있었다며 회사의 책임자인 남편한테 저 아래 지방 큰시숙이 전화를 했다. 5형제 중 막내인 남편만 내려오라는 급 연락을 받고 열차를 탔다. 그리고서 시신의 감정결과를 보기 위해 해부하는 과학검사대에 다른 삼촌 두 분과 같이 들어가서 안 봐야 할 걸 다 봤다. 사망한 시점이 새벽 한 시 반이라고만 밝혀졌을 뿐이다.
너무나 찝찝하여 날짜를 미루려다 말았는데 복잡해질까 봐 그냥 예식을 치르게 됐다. 살면서 성질이 난다. 이날이 되면. 시부모가 안 계셔서 인지는 몰라도 애경사는 남편 혼자서 다 감당하여 다니고 큰형을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은 무속인을신봉하면서 어찌 새 신랑감을 함부로 써먹었는지 눈을 붉혀뜨게한다.미국의 명배우 찰스브론슨의 콧수염까지 닮으신 시아버님이라도 계셨으면 상의 되지 않았을까?
시누네 아들이 혼삿날 잡아놓자 큰조카 결혼식에 불참한 시누네는 뭐냐고. 그래서 큰 어른들한테 욕을 먹는다.
결혼식을 마치고 시가 어른들한테 이불 한 채씩을 내드리고서 서귀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한복과 양복을 입은 채로 콘베어에서 짐가방을 찾는데 제주공항 도착 4시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옷 가방이 안 보였다. 몸이 후들거린 자정 12시 반이 되어 덜렁 우리 가방을 찾아서 부랴부랴 택시를 잡았다. 나의 신혼은 옛날 정지문 열 때 삐거덕 소리 나듯이 여기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역정 반 지침 반으로 숙소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안 오는 줄 알고 다른 손님을 받았단다. 서귀포호텔의 청소 하시는 아줌니가 이리 대변하시고선 청소도구와 객실 서비스 물품을 잔뜩 보관한 방을 내주셨다.
3박 4일 동안 동그란 제주 한 바퀴를 돌며 제주 마크가 찍힌 수건이랑 귤 박스, 돌하루방 등 선물 사기도 급급했던 건역시큰시누의 심부름이었다.
시골로 인사를 가서 신혼여행 가방 문제가 시골 친구들로 인하여 생긴 걸 알게 됐다. 가방은 시골 친구들이 먼저 싣고 김포공항을 출발했으며 우린 사회 친구들 차에 타게 된 것이다. 이렇게 꼬인 것을 시골서 이 친구들이 해명해 주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였다며 미안하다는 말은 않고 좋은 추억거리가 생겼을 거라며 다들 키득키득 웃는데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은 걸 참아내냐고 얼굴이 붉었다. 뻔뻔한,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빈 인사도 못 해주더라. 그때는 김 기사 네비도 없고 유선으로만 전화 통화가 됐을 뿐 삐삐조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통신망이 디지털로 안되고 내 운명이 꼬여서였나보다 자숙을했다.
첫 살림을 차린 후 남편은 내가 해 간 TV다이 서랍에 나이가 같았던 죽은 사촌 사진을 잔뜩 갖다 놓고 매일 확인을 했다. 그것도 매일 새벽 한 시 반에 술을 진탕 쳐드시고 와서는.
아래층에 세가구가 살았는데 다들 남편이 이른 시간정시에 퇴근하는데 신혼인 나는 미련하게 입술 타고 밥 굶다 잠들곤 했다. 이러다 못 살겠다 싶어 바로 이웃에 위치한 시누이 집으로 가서 이실직고했다. 일주일 후 봐둔 무당집을 같이 가잔다. 소개받은 굿 집에서 마른 북어에 실타래를 감아서 우리 내외 속옷과 같이 싸놨다가 갖고 오란다.
돈을 백만 원 넘게 지불하고서 시키는 대로 준비를 하여 주방 다이에 올려놨다. 웬걸 참 희한했다. 아니, 어떻게 이날 6시 바른 퇴근을 하는가. 와서는 왔다 갔다 하니 북어랑 속옷을 인켈 오디오 위에 옮겨놨다. 안심하려는데 틀지도 않던 오디오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잽싸게 손을 놀려 선반이랑 냉장고 위 등 여러 번 굿에 쓸 용품을 이동했다.
저녁밥을 오붓하게 먹고 자는데 어디서 향 피는 냄새가 자욱이 나길래 자동으로 눈을 뜨게 됐다. 어둠이 머문 새벽 네 시! 옆에서 자던 남편의 흰 런닝에서 땀인지 모르겠으나 흰 연기가 나며 자꾸만 무섭다며 내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신혼에 굿을 하게 됐다. 담날 사진들 다 치어 버리고 조용히 지내다 일 년이 넘으니 내향적인이이는 새벽 한 시 반은 아니지만 술상무가 되어서 술과 손잡고 다녔다.
나는 깨금발로 많이 살아온 것 같다.
푸른 하늘이 반쪽이었던 것처럼.
산전수전 별걸 다 겪은 나는 이제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차 한잔의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고하늘을 자주 보는 나의 여백을 찾는다. 작은 것에도 감탄사가 나오니회양목처럼 느림의 미학을 따라간다.
*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데 빨간 단풍잎 하나는 스스로 세워져서 몸을 굽히지 않고 있다. 삶의 철학처럼 말이지 *
사촌 사진이 있던 TV다이는 굿을 하고도 매일 밤낮으로 뚝 뚝 소리가 울어대서 유명메이커 보루네오(그때는 상당한 가격) 제품인데도 현관문 밖으로 밀어놨다. 이날 내 엄지발이 지리게 눌러지더니 시커먼 멍이 들고 결국 발톱이 점점 벌어지다 빠졌다. 코로나처럼 독한 경험을 하게 됐다. 염치없는 노랭이 형제들을 무지 괘씸하게 여기며 차츰 멀어지니 결국은 저절로 안 보고 살게 되어 뱃속이 다 후련하다.
이때쯤 넷째 시외숙모님이 내게 그러셨다. “저 애들이 왜케 지독한가 몰라.”
막내 시누이의 잘생긴 애인도 한 번 전화해서는 “광막이 큰 누이 나이는 어린데 눈빛이랑 말투가 여느 사람 아니네요. 조심하면서 사셔야겠어요.”
중학생 애들 과외를 시작했다며 막내 시누랑 이별을 하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내게 전했다. 쥐새끼부터 여시에 늑대까지 뱀의 혀를 두른 형제들 틈에서 오지게 힘들었다. 내 가계부를 뒤지고 장 보고 오면 둘째 시숙이 큰 시누이가 내준 우리 집 비상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와 안방에 누워있었다. 이런 것들 외에도 상상이 안 되는 내뱉기조차소설이 되는 상처들은 비껴갔다. 이 나이 되니 안 볼 것은 피해 가도 되더라. 내게 편애 됐던 고달픔이 남편이 가는 날 눈 녹듯이 삭아졌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여서 추수 감사제의 기도처럼 고개를 숙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