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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버티다

(11) 귀골스러운 됨됨이

by 블라썸도윤

명리학을 전공하셨으며 법계 쪽에 계시다가 골프용품점 매장을 크게 하셔서 골프 저널에 사진과 기사가 실렸던 분이 내가 수업하기 좋은 날을 택일해 주셨다. 내가 이분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엔 문화일보 여 지국장과 가까이 지냈던 관계로 우연히 같이 들르게 된 것이 지금은 20년이 넘은 인연이 된 셈이다.


스승님도 나도 무속인이 아니며 우리는 조금씩은 앞을 볼 수는 있다. 그리고 고객에게 함부로 말을 놓지 않으며 차분히 설명해 드리고 사주지를 출력하여 재해석과 질의를 받아준다.


내가 처음 원장님을 뵈었을 때 단박에 하신 말씀이 “형제들이 왜 이렇게 못됐어.”를 거짓말 안 보태고 다섯 번을 내리 그러셔서 놀라웠다.


또 하나는 이곳이 손님이 자주 드나든 것도 있지만 다른 곳에 가서 이분처럼 같은 형식으로 통변을 해주는가를 시험차, 그리고 답답하니까 서너 곳을 들렀었다. 사주 네 기둥의 기본만 설명해 주고 20분 딱 되니 그만 가보라는데 아주 냉철했다.


김 원장님한테 지도받아야겠다는 불타는 의지가 생겼다. 수업료를 다달이 내며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 반씩 수업에 할애해 주셨다.


무슨 말인지 생소하고 목화토금수 오행의 상생과 극을 외워야 하는데 그동안의 피로 누적으로 집중이 안 됐다. 마을버스를 타고서 손가락으로 이 오행을 꼽아보니 쉽게 외워지게 됐다. 그래 시작이다. 이런 식으로 내 것을 만들자.


뾰족한 정답은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일러주신 방법으로 외우고 문제를 스스로 내어서 실전으로 풀어보는 형식으로 활용해야 했다. 새벽에도 가물거리면 다시 시도하고 용수철 노트 5권에 똑같은 글자를 적어놓기 시작했다. 학습을 다섯번 반복하는 것이다.


압구정동이 댁이신 원장님은 밥해주는 언니가 나랑 두 살 터 위였는데 자꾸만 살림살이에 필요한 도구나 간식을 요구했다. 원장님은 이런 것을 좋아한다며 눈치를 바로 채고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챙겨 가는데 이것이 치사스럽고 로 따졌을 때 돈이 수업비보다 더 들어갈 때도 있었다. 엄마들이 살림하면서 푼푼이 나가는 돈이 더 크다는 말을 실감했으며 손에 과자라도 가볍게 들고 가는 날에는 여태껏 기꺼이 외워놓은 게 물거품처럼 다시 정리해야 했다. 혼란스럽고 그동안 해 온 것이 아까워서도 손을 뗄 수 없으며 악착을 더 가졌다. 이런 방법으로 유치하게 교육하는 군을 느꼈기에 더욱 내 것을 만들기에 급급해졌다.


어느 날 샤워 후 수건으로 살살 얼굴의 물기를 닦는데 왼쪽 눈가가 까졌다. 그러더니 점점 부위가 커지면서 욱신욱신 쑤시고 물집이 잡혔다. 뭐지 했는데 주말 이틀을 어지럼증으로 고생했다. 월요일 아침에 당장 피부과로 갔더니 대상포진이라고 해서 유명한 병인데 어떻게 주말을 잘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잘 넘어갔으며 일주일간 빠졌던 수업을 보충해 주셨다.


내가 죽어라 파고들고 이해가 덜 간 부분을 전화드리면 과외로 지출이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피하셨다. 공부는 길만 알려주지 나의 목적지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구나를 깨닫고 다른 한 곳에 접수를 또 해서 이중으로 수업을 들었다. 이곳은 최○○라고 TV 방송에도 나왔던 분이다. 통변 반에 오라고 하며 3개월 치 수업료 백만 원을 한꺼번에 납부하라고 강요해서 한자리 잡고 앉았는데 건너편 이는 4년 차여서 한 개 한 개의 뜻은 잘 알고 있으나 풀이를 못하고 나보다 실력이 아니구나를 느꼈다. 통변을 계속 풀이할 줄 알았는데 이곳 원장은 점심도 고급으로 사주고 매번 간식을 포장해서 내줘야하며 원하던 수업이 아니었다.


특히 오래된 이가 용신을 못 찾겠다고 하니까 최 원장이 이랬다. 용신은 굳이 몰라도 된다며 그를 안정시켰다. 작명지을 때도 필요한 용신을 대충 넘어가다니 틀렸다. 삽자루 들고 애써서 일한 농부에게 물이나 요깃거리를 안 내주고 다시 또 한 자루의 삽을 내주는 격이다. 유명인이라고 자처하며 나도 TV에서 봤던 인물이 황당하다.


여긴. 그래도 3개월 동안 죽어라 나갔다. 두 가지 정도는 파악하고 이 집 수업은 끝냈다. 수강생을 돈으로 환산하는 수법이 눈에 들어왔지만 악착같이 나간 건 하나라도 건져 와야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어라 이 악문 것을 아시게 된 김 원장님이 속성으로 지도를 해주셨다. 그래도 명리학자가 반드시 알고 가야 할 것은 짚어 줬는데 통변에서 월 운을 약하게 지나치듯 넘어갔다. 내가 파야지. 책이 닳고 이면지 한 박스와 노트 다섯권을 채웠다. 친구나 아무 사주를 넣고 풀기 시작했다.


일 년 만에 김 원장님이 “이 원장으로 이제 개업해 보게 그래봐 사무실을 알아보라.” 하셨다. 사위랑 지나치며 도로변을 유심히 봤는데 딱히 감을 못 찾겠더라.


삼성에 근무하는 사위한테 컴퓨터와 책상 문제를 구비하게 하고서 우연히 셔터가 2년은 굳게 닫힌 곳이 있길래 옆에 붙은 로또방에 문의해 보니 담당하는 부동산을 알려줬다. 길가인데 무허가 건물이어서 월세가 저렴했다. 게다가 잘된 것이 우리네 업종은 사업자등록증이 필요치 않아서 안성맞춤이기에 담날 바로 계약했다. 칼국수 집이었는데 무허가증으로 맛집이지만 신고가 들어가고 난 후 내가 오게 된 것이다.


건물주 내외분이 신경 쓰지 말고 돈을 많이 모으라며 다독여 주시며 손도 꼬옥 잡아 주셨다. 보통의 건물주와는 이면의 온기가 있으셨다. 내 사주에는 합의 글자가 하나도 없어서 인복이 없는 것으로 해석이 되는 것인데 주위에 보드랍고 따신 이들이 꼬이는 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방향에 있지 않을까?


나는 스윗하다. 남편과 거래처 직원으로 만나서 부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부터 나는 남편의 엉덩이를 투둑투둑 두드리며 “자기야! 고생했어. 힘들었지.” 이러면 남편이 징그럽다며 왜 그러냐면서 엉덩이를 피했다. 동네 분이고, 누구를 지나치면 인사 하나는 꼬박꼬박 잘했다. 상냥함은 타고난 성격 같다. 아직도 나는 싹싹하다. 내가 자부하는 자격증 같은 것이다.


수리를 다시 하냐고 도배를 하고 늘어진 전기선을 봐주었다. 한 달 있다가 정식으로 문을 열기로 한 사이 명함 만 장중 9천 6백개를 돌렸으며 계단을 탔다. 컴퓨터가 오는 날 사위가 설치 끝나자마자 “어머니 한 번 해보세요. 한순간 말문이 안 열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손님이라 생각하고서 상담을 들어갔는데 월 운에서 막혔다. 사위 앞이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틀 후엔 개장일인데 몸이 후끈 달았다. 바로 스승님한테 SOS를 쳤다. 내일 간다고.


다시 고객 받을 준비부터 스승님 앞에서 연습하고 더듬지 않도록 월 운에 신경을 썼는데 요것이 초점이라 밍숭대셨다. 누가 이런 것도 다 알려주냐면서 어느 자리와 운성과 살에 따라서 통변이 달라진다. 난 저녁 오후에도 통변 터져 나올 때까지 집에 안 간다고 했더니 이 언니가 점심이 되자 웃기는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닌가. 이제 연세가 있으셔서 술을 입에 안 대시는데 대낮에 술 약속이 있다면서 본인은 우리집 근방의 시장에 가야겠단다. 하는 수 없이 언니랑 깉이 나왔는데 결코 우리집에 있다가 도로 원으로 가더라.


이제 하루 남았다. 전화 않고 또 찾아갔다.


“원장님 저 오늘은 여기서 통변 터질 때까지 있을 거예요. 자고 갈 의향이 있어서 가방에 세면도구 챙겨왔어요. 팥떡도 이쪽 동네에서 찾아서 가지고 갈 겁니다.


스승님이 불안해지기 시작하더니 사주지 여러 장을 내주셨다. 터졌다. 오후에, 이제 됐다. 집 오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오픈하자마자 바로 첫 손님을 예약해 놓았다.


사실 이곳과 가까운 지하상가에는 12곳이 사주보는 곳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다. 난 따로 바깥바람이 좋아서 담배꽁초 특히 여성이 물었던 꽁초는 한 번 더 발길에 차내고는 집게로 주워도 아래층을 택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인지라 밤새 물수건을 했으며 비가 축축이 뿌리는데 희한하게도 입가가 벌어졌다. 팥시루떡은 뜨거운 연기 뿜어져서 돈이 따르라고 뚜껑을 덮어놓지 않는다. 가만히 속으로 빌기만 했다. 제게 기를 주셔서 통변을 잘하게 해달라고 딱 이 한 가지만 기도했다.


첫 손님인데 아는 것을 못 알려준 게 있어서 조금 아쉬움이 남았지만 상담이 된 거 아닌가. 원의 언니가 와서는 떡 다 식게 왜 놔뒀냐며 미련 맞은 소릴 하더니 떡은 반이나 더 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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