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콩깍지 팥깍지
선잠을 잔 건지 못 잔 건지 난 항상 통잠을 못 자고 쪽잠에 시달렸다.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서 업무는 눈 뜨자마자 시작인데 SNS로 카톡 단톡방으로 총알받이처럼 잘 받아내야 한다. 처음엔 재미도 붙이고 내가 이걸 못해낼까? 자신감을 절여 논 배추처럼 당당히 버텼는데 십여 년 가까이 오니 난 한계를 짐덩이처럼 가졌다. 다 떨구고 싶어 도저히 안되겠어서 엄마가 계신 납골당에 가서 빌었다. “엄마, 다 보셨잖아. 그럼 나 좀 살려줘. 난 이제 너무 지쳤어. 아침에 눈뜨기가 아주 힘들어.”
B기업의 한 기사는 차에 오르다 쓰러져서 바로 이승을 떠났다. 우리 운송일을 하셨던 분은 매일 광주 원청 업체를 왕복으로 운행하시다가 졸음운전으로 가셨다. 원청과 두 곳의 상부 업체와 우리 이렇게 4업체가 한 뭉치로 굴러가니 화환 4개와 애도를 표하고 업체 직원은 이 분을 잘 안다면서 개인적으로 조의 표시를 하기도 했으나 이 무슨 소용인가 일만 하시다가 가신격. 말이 쉽지 남의 일이 아니다.
“난 소현이 시집보내주는 의무가 남았어. 엄마! 나 좀 빼내줘. 다른 방법으로 살아나갈 자신이 있으니 나 좀 아들 뒤치다꺼리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제발!” 다음번에 가서도 기도처럼 속의 것을 뱉어냈다. 10년간의 오금을 펴고 싶다고 했다. 몸이 지칠 대로 맛이 가서 스스로 지탱이 힘겨운 게 출근이 더뎌지고 있다. 현기증이 팍팍 일어서 메슥거렸다. 느껴지는 만큼 외쳤다.
들어주셨다. 응답이 왔는데 내가 고된 일이었던 수면 부채 자리가 바로 위 업체서 억대의 부도를 내고 말았다. 힘들고 공휴일 없이 내겐 쉼표가 없던 거래는 금액이 컸다. 1억이 넘는 돈을 내 고생비가 깡그리 사라졌다.
산고의 고통처럼 하늘이 노랬다.
정리가 될 때까지는 내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하고 다른 업체 일을 제대로 봐줘야 하니 머리 감춘 자라가 되어 기어 기어서 회사를 나갔다. 남동생은 연락 두절이더니 일 주 만에 정식 출근을 해주네.
부도를 낸 회사는 서로 가족같이 여기고 매주 토요일은 창고료 관계로 직원들과 인사를 편히 나누던 사이다. 이 직원들도 급료가 몇 달 치 밀려서 썩은 사과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 코가 석자라 기사 양반들 사무실에 돈 달라고 줄 서서 쳐들어 올지도 모를 사항!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해를 한다는 듯이 되려 걱정을 해주고 사태를 알아가려고 했음에도 우리 운송일을 계속 맡아서 해주셨다.
유종의 의미! 대형 상장회사가 하나 날아갔으니 난 그만둬야 했다. 내 급료가 생성되지 않아서 마지막 인사들을 나누고 호젓이 나왔다.
살아갈 자신감을 갖고서. 7745 11톤 기사도 그랬다. “자신감 있으시죠. 자신감만 있으면 됩니다.” 위로를 받고서. 내가 정리하고 일궈 논 정보는 중간업체에서 낚아갔다. 파일의 저장은 싸그리 상부 업체로 넘겨졌다.
아깝다. 내가 업무의 편리를 구축해놓은 문서들이 중간에서 공유 돼버리다니. 우린 실화주 이기도 했는데 큰 창고를 갖고 있지 않아서 메인업체를 상부 업체로 넘겨줘야 했다.
파일에 일을 도모하는 연락처를 다 기록하고 손글씨로도 전화번호부에 중요사항까지 빨간펜과 형광펜으로 표시해서 꼼꼼하게 해놨는데 남동생은 이런 건 필요 없다더니 다음날 앞표지를 뭘로 둥그렇게 지져놨더라.
철퍼덩 얼음판에서 미끄러진 느낌, 욕실에서 고꾸라져 잠시 숨이 콱 막힌 그런 심정이 들었다. (이중으로 확인하는 게 좋다. 전산오류로 날아가지 않게, 또한 정보가 노트엔 훨씬 상세하다.)
24시콜만 가지고는 일이 안된다. 내가 지적해놓은 걸 참고해서 슬슬 구슬르고 알랑방귀도 뀌어봐야 한다.
셔틀에서 인사하게 된 관세사 CEO분이 행운 받으라고 주신 2$
업무폰 안에 든 불필요한 몇백 명의 연락처와 내 짧은 일기와 많은 사진을 다 삭제한 후 뒤처리를 인계해 주고 공항철도를 그만 타게 됐다.
출·퇴근 때 책을 들고 인사하며 노천명 시를 내가 읊었던 자리. 같은 시간 같은 방향의 목적지에서 꼬박이 인사를 서로 먼저 나눴던 출근 자리는 이제 생소해질 것이다. 처음 셔틀을 기다릴 때부터 많은 생각을 먼저 갖게 해준 나무는 bye bye!
그냥 나올 수 없어서 둘째동생이 알려줬던 앱에 들어가서 영어유치원 청소 자리를 바로 가게 됐다. 동생 회사를 나오기 전 미리 청소하시는 분한테 청소요령을 알아놨고 그만둔 다음날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또 일을 한다. 보름 정도 후 난 단순노동 청소를 접었다.
땅딸막에 심통 맞은 아줌씨는 우리집과 지근거리인데 고참 행세를 막말로 했다. 본인 남편이 경찰 출신이라는데 본인이 마치 경찰을 한 것마냥 성찰이 안되면서 전철에서 어찌나 으시대며 과시하는지 같은 말을 매일 번복하는데 꼴불견여서 나왔다. 내가 도매금에 넘어가는 것처럼 상당히 역겹고 불미스러웠다.
국제 유치원 청소 시 부적절한 광패의 그 아줌씨가 우리집 부자냐고 해서 부자죠 2달러 있어요. 함. 참으로 그 나이에 유치할 수가 없다. 전철에 사람이 많으면 굉음 같은 소리로 난 척을 펴놓고 하는데 말재기에 구역질이 났다. 인상풍김에서 인성이 묻어 나오더라.
시간상 잘 못 다녔던 철학관 원장님을 뵀다. 계기가 돼서 두 달을 딱 휴무하고서 철학 사주 공부를 하게 됐다. 새벽에도 일어나서 외우고 적용하고 해서 난 재미를 붙이게 됐다.
첨엔 어렵게 다가왔으나 내 지지의 4글자가 나를 끌어당겨서 난 지금 작명까지 하는 철학관을 운영 중이고 핸드폰을 새로 구입하고 연락처를 다시 관리하게 됐다.
명리학을 전적으로 배우는데 공짜는 없어서 월 상납금 말고도 요깃거리를 챙겨드리는 날은 답이 바껴서 눈 부위에 대상포진을 걸리기도 했으며 다시 외워가며 특강을 다른 곳에 가서 받기도 했다. 마지막 나의 직업이라 생각하며 악물고 해서 오픈 전날은 물수건을 밤새 했었다. 청소 마지막 날 대개 앓아가면서 버팅겼듯이 내 마지막 정점을 찍은 날 아침부턴 물수건 혜택을 벗어나서 기운이 솟구치며 괜히 신이 났다.
처음이란 시작 앞에서 떨었기에 청심환 물약을 한 달에 4번은 드링크 했지만 이젠 겁이 없다.
내 엄니가 별이 되신 후 내 아이 둘이서 상당히 가까워졌고 이젠 좀 쉬엄쉬엄 원하는 것을 펼쳐보라고 철학관을 내게 해주셨으며 책을 원하던 대로 실컷 읽으라고 브런치 작가도 단 번에 되게 길을 터 주셨다.
수출입 관계의 업무로 시간개념이 없던 나는 번아웃 증후군까지 왔으나 잘 견뎌냈다. 체력이 소진되면서 새 인생의 길을 가야 한다.
정약용의 락(樂)에 쓰여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돼 오는 것.
가난하고 궁핍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서 오는 것이라고 명시됐다.
난 이런 상황이 있었던 지나던 곳에 미운 털이 배기기 시작했던 이곳을 거쳐가야 하는 자리에서 작명 사주를 봐줄 수 있는 철학관을 오픈했다.
힘들어서 오는 분이 거의라 토닥토닥 해주며 좋은 날도 가려주었다.
그리고 운동하고 산책 좀 하라고 강아지 ‘태양’일 보내주셨다. 내게 술을 권함처럼 엄마는 다 알아보셨다. 감사합니다! ♡♡♡♡♡
휴무가 잠시 생기니 대학로로 연극을 실컷 보러 다녔다. 나처럼 나이 든 사람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지만 사위도 같이 가서 좋았고 난 연극이나 서커스 등 행위예술에 흥을 끌었다.
암튼 맘이 편해서 좋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온다. 지난날의 책 내용은 가물가물하잖은가. 오전 오후는 태양이가 날 운동 시켜주니 이것이 내가 사는 방법! 자식집도 찾아가기 힘든데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어른 유지비가 있을 정도면 되잖은가. 밥 한 끼 살 수 있는 여유.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기본 인사와 함께 마음 부자가 되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