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서는 이미 시로 썼어요
전라도 나주에서 살던 엄마는 10대 때 일을 찾으러 서울 옆 동네로 이사를 했다. 서울에 정착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외갓집 식구들과 함께 올라와 먼 거리를 출퇴근했지만,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고도 엄마는 서울로 끝내 입성하지 못했다. 일을 위해 열정을 쏟던 엄마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처음 이사 온 동네는 우연하게도 지금 내가 2년째 살고 있는 동네이다.
내가 지금 동네로 이사와 가족이 집 구경을 하던 날, 차를 타고 동네를 지나가며 엄마는 반가운 옛 동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던 중 내 눈에는 어느 삼거리 골목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느티나무가 보였다. '아, 옛 마을 어귀엔 당나무 하나쯤은 있었다는데 여기도 그런가 보네.' 나는 한창 동생에게 서울에서 살고 싶었다던 옛이야기를 하는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 여기 당나무에서는 제사도 지냈었어?"
그러자 엄마가 무슨 말이냐는 듯,
"당나무가 여기 왜 있어?"
"아니, 여기 옛날 엄마 동네였잖아. 방금 저 작은 삼거리 골목 중간에 나무 하나 있던데, 당나무니까 아직 있는 거 같아서."
"당나무 같은 거 여기 없었는데?"
"어? 방금 무슨 중요해 보이는 나무 하나가 아스팔트 중앙에 떡하니 있던데, 그거 당나무 아냐?"
"아니 여기 당나무 같은 거 없었다니까. 나무가 어딨어, 저 뒤에 산 쪽이나 있지. 그나저나 내가 여기 살 때 네 삼촌이 얼마나 속 썩였는지 아니? 그게…."
그렇게 나무 이야기는 쓱 지나가 버렸다.
어느 날 햇살이 좋아서 자전거를 빌려 마실이나 나가던 중에 그곳이 궁금해서 다시 찾아가 봤다. 분명히 아스팔트 사이 섬처럼 보였던 굵직한 느티나무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있지도 않았던 엄마의 추억 속 나무는 동네를 지키지도 못하고 허리가 잘렸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어릴 적 살던 연립 단지 입구에 자라던 삼나무가 사라진 날 같았다.
내가 사는 이 도시의 호수공원 한켠에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에 대한 일종의 권리선언문이 새겨져 있다. 마치 '동물권'이라고 하여 같이 사는 반려견이나 반려묘도 하나의 존엄한 대상으로서 대하자는 그런 내용과 비슷한 취지인 것 같다. 임시보호 하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도중, 이 선언문 바위를 보고선 난 '어린아이들이 이 선언문을 보면서 나무를 더 아끼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다 곧장 내 생각의 흐름은 이렇게 흘러갔다. '이 선언문은 나무라는 생물에 대한 존엄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나무라는 존재는 어떤 '장소성'을 가지는 특별한 생명체라고 생각한다. 어느 땅에 뿌리내려, 어떤 나무들은 그곳 시간과 장소에 일어난 일을 다 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단순히 심고 가꾸는 이야기 외에 시간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 나무에 대해서도 귀 기울여주면 어떨까?' 참 아름답고 이상하게 흘러가버린 생각이었다.
갑자기 개가 바위 위로 마킹을 했다. 그 모습에 생각이란 호떡을 뒤집듯 '사람 하나도 제대로 존엄이 지켜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아니, 일단 내가 발 뻗을 자리도 잘 지켜지며 사는 것 같지 않은데 이게 다 무슨 말장난이야?'라는 생각 결론을 내리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