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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Apr 19. 2024

4. 백수라서요. 제가 다 할게요.

백수라 돈은 없는데 시간은 많아서 집을 혼자 다 고쳐보았다.

하필 이 시점에 내가 백수가 되었다는 건 상당히 난감하고 갑갑한 상황이었다.

첫 독립에, 붙박이장 하나 안 붙어 있는 이 깡통 같은 집에 들어갈 살림이 대체 얼마며, 주식에 들어간 돈의 손해액이 어마무시하여 차마 팔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사라니, 독립이라니.

돈이 아쉬울 때마다 '제작년 그 사건'은 꼬박꼬박 찾아와 분노와 억울함을 내세워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을...


나는 그간 직업이 좀 많았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나의 기질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고 그리고 그걸 또 해봐야 직성이 풀리다 보니 이 기질이 내 평생 밥줄이 되어줄 수 있는 직업에까지 영향을 주어 많은 방황, 좌절, 실패 그리고 아주 스치듯 지나간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참 힘들었다. 그렇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렇지만 돈은 당연히 잘 모아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 그 쓸데없이 차오르는 기분을 잠시 눌러주고 꾸준히 잘 다녔으면 나도 지금은 작은 집 하나는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지난 일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


이 집이나 잘 고쳐보자.

도배가 생각지 못하게 미뤄지자 난 페인트칠 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이 집에 들어서면서 어딘가 모르게 자꾸 내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게 있었는데 유독 거실만 가득하게 채우고 있는 체리 몰딩, 그도 그럴 것이 30년이 된 아파트이니 아마도 그 시절 유행했던 체리 몰딩으로 집을 가득 채웠으리라... 그러나 방은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흰색으로 되어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거실만 하면 되니까.

흰색 페인트를 사서 그간 Youtube에서 공부했던 팔목의 스냅, 붓질 방향, 붓터치 이런 지식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고 이제 실전에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설레었다. 정말 잘할 것 같았다.

그러나 체리는 강력했다. 세 번을 덧칠해도 시간이 좀 지나면 체리는 다시 메롱하며 나에게 인사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 벽화로 천지창조를 그릴 당시 목과 팔이 돌아갔다는데 그게 이런 느낌이었을까. 비교하기에도 민망하지만 내 어깨와 목도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난 여섯 번을 덧칠한 후에야 더 이상 체리를 볼 수 없었다.

체리야 잘가 안녕

이젠 문들을 칠해볼까.

역시 Youtube에서 공부했던 지식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문손잡이를 다 뜯어내는데 이걸 어쩌나... 문이 삭았다... 손잡이를 떼어내니 그 안에 있는 나무들이 같이 떨어져 나왔다. 경첩은 누군가가 나사 홈 부분을 페인트로 다 덧발라버려서 홈에 전동드라이버가 박히지를 않아 헛돌았다. 경첩은 그냥 포기하자... 내 집 아니다.

기분 좋게 자 이제 문을 칠해보자 하는데, 이건 뭐지? 문 뒤에는 수많은 텍스트 스티커가 가득 붙어 있었다. 이런 긴 편지를 문에다 쓰다니, 그들의 사랑이야긴 난 알고 싶지 않았고 그들 또한 알려줄 필요 없었는데 자신들의 금실 좋은 모습을 너무나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그 욕심은 알겠으나 자음과 모음이 다 따로따로 붙어 있는 이 스티커를 떼는 일은 나에게 시키지 말았어야지. 체리가 메롱할 때보다 더 화가 났다.

스티커 붙이기 떼기 놀이를 좋아하는 우리 막내 조카를 꼬셨다.

"꼬맹씨! 이모집에 진짜 재밌는 스티커 놀이 있는데 우리 꼬맹씨가 엄청 좋아할 거 같아! 가볼래?"

꼬맹씨는 스티커라는 말에 신나 하며 그 더운 여름에 에어컨도 안 나오는 이모 집에 와서 열심히 떼어 주었다.

"이모! 나 벌써 이만큼이나 했어!" 하는 고사리 손에는 이제 고작 '세 개의 단어'가 떼어져 있었다.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아 졌다. 꼬맹씨가 손톱이 아픈 느낌이 든다고 했다. 꼬맹씨를 데리고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더 이상시키지 않았다. 나쁜 이모... 미안해 꼬맹씨.

다음날 난 웃거나 소리 지르면서, 분노하거나 다시 웃으면서 그 모든 글자를 다 떼어냈다.

권**씨는 행복했고, 난 고단했다.


자 이제 페인트칠은 다 했으니 손잡이를 달아볼까?

예쁜 손잡이는 이미 다 사 두었고 Youtube는 나에게 모든 지식을 다 주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우리 집 앞에선 참 무용지물이었다. 손잡이 부분이 삭아버린지라 나사가 헛돌았다. 손잡이가 덜렁거리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사를 비닐에 감아 그냥 박았다. 그러니 제법 고정이 되었다.

맥가이버가 된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입주청소업체는 손잡이에 묻은게 전혀 안닦인다고 호소 하길래 내가 한번 휴지로 닦아보았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바로 닦였다. 이렇게 닦이는걸 보니 더 쓰기 싫어져서 아예 바꿔버렸다.


이렇게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던 페인트칠이

몰딩 6번, 문과 문틀 4개를 각 3번씩, 창틀 2개 3번씩, 그 외에 부분 부분의 칠로 마무리가 되었다. 페인트 전문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탈 많던 도배가 끝났다.

그런데 바닥이 난리 난리 이런 난리가 없었다.

난 이미 입주청소가 다 끝난 상태였는데 도배가 예상치 못하게 미뤄지는 바람에 돈 주고 청소한 흔적 하나 없이 집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 입주청소도 진짜 할 말 많은데 이번 이사하면서 한 업체가 한 번만 온 적이 없었는데 입주청소도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팁을 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후기에 사진까지 첨부해서 낱낱이 다 밝히고 싶었으나 고단한 난 그럴 힘이 없었고 사실 해코지 당할까 무섭기도 했다. 난 쫄보다.

아무튼 도배 후에 엉망이 된 바닥은 걸레질로 될 것이 아니었다. 바가지로 물을 들이붓고 스텐헤라로 다 긁어내기 시작했다. 무릎과 허리가 나갈 것 같았다. 박찬호크림을 바르고 다시 바닥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고단했다.

이사는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인가.

부모님 집에 얹혀살 때는 그저 내 방 정리하느라 힘들었던 기억뿐인데

내가 참 곱게 살았구나. 부모님 감사합니다.


바닥을 청소하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왜 바닥과 벽의 경계 부분에 시멘트 벽이 보이는 걸까?

그렇다. 이 집은 걸레받이가 없구나. 사실 걸레받이라는 것도 무엇인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천장공사를 해주신 사장님께 문의를 드려보았다더니 견적이 꽤나 비쌌다.

그래 난 백수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은,

내가 한번 붙여보자. 붙였다. 생각보다 잘 붙였다. 실리콘 마무리까지 완벽했고 다들 나의 작품을 보고 놀랐다.

가까이 보면 흠이 많지만 누가 이걸 가까이에서 보겠는가. 그러니 완벽하다.


이사엔 배달이지. 배고파서 음식쓰레기가 안나오는 햄버거를 배달시켰는데 아뿔싸… 포크와 나이프 요청을 안 했다. 햄버거를 먹는데 나이프가 뭐 하러 필요하겠냐마는 이 와중에 난 4개의 멀쩡한 이를 다 뽑아내는 하드코어 치아교정 중이라 햄버거를 베어 먹을 수 없어 나이프는 나에게 필수였다. 이 집에 있는 거라곤 나무젓가락 하나뿐, 그 나무젓가락으로 햄버거를 자르고 자르다 잘려야 하는 햄버거는 안 잘리고 나무젓가락이 두 동강 났다. 그 두 동강 난 나무젓가락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꾹꾹 눌러온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파혼하자마자 교정을 하게 된 건 지극히 T성향의 우리 언니 때문이었다.

“동생아, 교정하자. 니 아랫니가 자꾸 보이는게 교정하라는 뜻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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