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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Jul 09. 2024

눈물 한 방울조차 아까운 실연

<마라토너 강유원 이야기>


홍콩 영화 ‘중경삼림’에서 경찰 223역 금성무의 대사다.      

 

  “실연으로 낙담에 빠질 때가 있다.

   가슴이 아프면 난 조깅을 한다.

   조깅을 하면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아시안게임 여자마라톤 금메달리스트 강유원 선수의 실연은 금성무의 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실연으로 시도 때도 없이 무너져 내렸던 한 여자.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어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려야만 했던 한 여자. 그녀는 그 남자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기 싫어 자신의 몸속 수분을 마라톤으로 모조리 빼고 싶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에게 단 한 방울의 눈물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고.      

      

그녀의 실연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눈물 한 방울조차 아까운 실연’이라 하겠다. 그녀의 삶에 유일했던 한 남자. 그녀는 그와 장장 10년을 만났다. 그와의 이별은 그녀의 세계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다. (중략)       

                                                                                                            <취재 - 진혜원 기자>




<피플스>에서 면접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노들섬으로 향했다. 광화문역에서 5호선을 타고 여의도로 갔고 9호선으로 다시 갈아탔다. 노들역에서 내렸다. 지하철 안에서 편집장이 건네준 기사들을 다시 살폈다. 매일 새벽 노들섬 인근에서 개인 훈련을 한다는 정보가 결국 다였다. 다행히 기사 여러 곳에 사진이 있었고 유튜브로 인터뷰 영상도 여러 개 찾았다. 인근이라는 건 노들섬 내에서 뛸 수도 있고 강 건너편의 이촌 한강 공원에서 뛸 수도 있다. 동도 트지 않을 시간에 와서 헤매기보다 환할 때 인근의 지리를 눈에 익혀 두어야 했다.      


  ‘인터뷰가 쉽지 않겠다. 이렇게나 넓은 곳에서 강유원 선수를 찾을 수 있을까.’     


다음날 새벽 3시 30분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휴대폰의 기상나팔 소리는 매일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5시 전에 노들섬에 가야 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1호선 망월사는 첫 차가 5시 13분이다. <피플스>가 자차를 우대하는 이유를 첫날부터 실감했다. 세면대에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의 눈곱을 겨우 떼고 물만 조금 묻혔다. 늘 입는 운동복에 머리를 질끈 묶고 야구 모자를 눌러썼다. 오랫동안 신지 않은 하늘색 러닝화도 꺼냈다. 고등학생 때 마라톤을 시작하며 산 러닝화였다.


오늘 강유원 씨를 만날 거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취재 1일 차는 노들섬에 가서 둘레길을 가볍게 뛸 생각이다. 뛰면서 앞으로의 취재 계획을 세울 것이다. 나의 파란 포터에 오래간만에 주유를 했다. 강유원 선수를 만날 때까지 매일 노들섬으로 출근해야 하기에 주유비가 상당히 들 것이다. <피플스>는 작은 잡지사였고 취재 비용은 선지급이 아닌 추후 영수증 처리를 해야 했다. 돈 떼어먹는 건 아닐지 조금 걱정도 되었다.      

  

밖은 깜깜했다. 소설을 집필하며 늘 깨어있는 시간이었지만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매캐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파란 포터가 달렸다. 기어봉을 잡고 기어를 변속하는 순간 차의 꿀렁임이 좋다. 포터의 매력은 5단 수동변속에 있다. 친구들이 2종 면허를 취득할 때 1종을 선택한 이유도 수동변속의 매력에 일찍 눈떠서다. 속도에 따라 기어를 변경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즐기고 있다. 기어를 제때 변경하지 않으면 시동이 꺼지기도 한다. 수동은 역동적인 운전을 가능케 했다.    


4시 35분 동도 트지 않은 한강 공원 주차장에 파란 포터를 세웠다. 이 시간에도 나와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대체 잠을 몇 시간이나 자고 나오는 것일까 문득 궁금했다. 나는 밤새 글을 쓰고 동이 틀 무렵이면 잤다. 반지하의 좋은 점이라면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비껴 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집안에선 동이 트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반지하 방이 때로는 고마울 때도 있다.   

   

포터에서 내려 맹꽁이 숲이라 써진 표지판을 가로질렀다. 어제 오후에 이미 둘러보고 간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가볍게 돌아볼 요량이다. 달리기 앱을 열었다. 러닝 목표를 10km로 설정했다. 노들섬 둘레길이 2km 남짓이니 다섯 바퀴 정도 돌면 될 것이다. 절기상 소서를 막 지났고 오늘 일출은 5시 17분이었다. 이미 동쪽 하늘은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달리는 것이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7년 동안 마라톤을 했다. 열일곱 살에 10km로 시작한 마라톤은 1년 만에 하프를 뛰게 했고, 대학생이 되어선 풀코스까지 뛸 수 있었다. 달리기는 정직한 운동이고 뛰는 만큼 늘었다. 글만 정직하지 않은 것 같다.  


서울의 새벽 공기가 상쾌하진 않았지만 오랜만의 가쁜 숨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달리면서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곁눈질을 부지런히 했다. 달리다 보니 운 좋게 만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왜 사람들이 아침잠을 포기하고 달리는지 알 것도 같다. 달리는  희망을 품는 일이다. 그래서 나도 지난날 그렇게도 달렸던 것일까. 둘레길 세 바퀴를 막 돌았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꽤 잘 뛰네요. 마라톤 하나 봐요?"     


뒤를 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인터뷰해야 할 인터뷰이가 떡하니 나타났다. 노들섬 둘레길은 훈련 경로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쯤 그녀가 운명처럼 나타났다.       


  "강유원 선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강유원 선수 맞죠?"      


  "날 알아요? 뛰는 폼이 예사롭지 않아서 아까부터 뒤에서 지켜봤어요."      


강유원 선수가 날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유원 선수 뒤로 마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난 그녀가 구세주 같았다. 수습 기간을 단축시켜 줄 구세주는 맞다. 웃는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며 갈등에 빠졌다. 내 목적을 바로 밝혀야 할까. 아니면 친분부터 먼저 쌓아야 하는 걸까. <피플스>는 그 어떤 교육도 없이 수습기자를 무작정 인터뷰어로 현장에 투입시켰다. 그것도 혼자 말이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솔직하게 밝히기로 했다. 나중에 내 목적을 알고 강유원 선수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긴 싫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피플스의 수습기자 진혜원입니다. 사실 강유원 선수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어요."       


그 자리에 멈춰 고개 숙여 인사했고 강유원 선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자라는 걸 알고 나를 거부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오~ 이 솔직함 뭐야~ 반가워요. 난 이미 알다시피 마라토너 강유원. 그 잡지사 인터뷰 이미 여러 번 거절했는데 혜원 씨가 직접 행차하셨네?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여기까지 나올 생각을 하고, 꽤 용감하네요. 몇 살이에요? 스물일곱?"      


  "맞아요! 어떻게 딱 맞히세요?"     


  "그냥 감으로. 난 알다시피 서른. 편하게 언니라고 부르지. 혜원 양!"           


만난 첫날부터 함께 달렸다. 둘 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마라톤을 접했고 같은 마라톤 대회에도 나갔었다. 고향도 바로 옆 동네였다. 우리는 고등학생 시절 서로 다른 시기였지만 남한강변달렸다.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다가 저녁 약속까지 바로 잡았다. 강유원 선수는 오후에 한 보습 학원에서 시간 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마라톤만으로 생활이 어렵기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퇴근하고 그날 저녁 8시에 학원 근처 호프집에서 강유원 선수를 만났다.    


  "그 잡지사는 왜 쓸데없이 남의 실연 이야기를 취재한대? 나 그 새끼 떠올리기도 싫어서 인터뷰 계속 거절했어. 우리 동생이 수습 딱지 떼려면 필요하다니까 하는 거야. 그 새끼 얘긴 술을 마셔야 해."    


첫 인터뷰에서 강유원 선수와 나는 안주도 없이 맥주만 연거푸 벌컥벌컥 마셨고, 녹음과 취재 일지에 개발새발 남긴 기록만이 남았다. 강유원 선수의 실연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강유원 선수 취재를 시작하고 보름이 지났을 때, 그간 들어간 비용을 정산받기 위해 <피플스>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면접 이후에 처음 찾는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에 볼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 편집장은 한 달 안에 취재를 마무리하라 했지만 인터뷰는 세 차례에 걸쳐 이미 마쳤다. 이제부터는 기사를 작성해야 했다. 편집장의 책상 위에 취재 일지들을 꺼냈다. 그중 한 곳에 끼워 두었던 영수증을 꺼냈다. 내가 내민 영수증을 보며 편집장은 한참을 뜸을 들이다 말했다.   


  “호프집 38000원, 포장마차 24000원, 대폿집 34000원. 술만 세 번을 마셨네요.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생각은 못했나요?”    


  “실연 인터뷰예요. 차나 밥을 먹으며 할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주는 일절 시키지 않았습니다.”


비용 최소화는 거짓말이고 유원 언니와 난 ‘강소주 파’다.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자들.   


  “아니, 그럼 이게 다 술값이란 겁니까?”     


  “네.”      


욕을 해가면서 마셨더니 술이 술술 넘어갔다. 편집장의 태도가 못내 거슬렸다. 돈 아끼게 해 줬더니만. 안주까지 먹었으면 비용은 배로 들었을 것이다. 고마운 줄을 모르고 못마땅해하다니. 취재 일지 한 장을 쭉 찢어 계좌번호를 적고 사무실을 부리나케 나왔다.  오늘 중에 통장에 입금이 되지 않으면 다시 연락할 생각이었다. 그날 저녁, 통장에 찍힌 취재 비용을 보고 씩 웃었다.  




  <에필로그>      


  혜원은 편집장의 책상 위에 취재 일지 하나를 놓고 나왔다. 계좌번호를 적으며 밑에 받쳐 두었던 취재 일지였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취재 일지를 놓고 왔다는 걸 알고 경악하고 만다. 한편 편집장은 어수선한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다 하늘색 노트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혜원의 취재 일지 한 면이 바닥에 펼쳐졌다.


세계 최강 마라토너 우리 유원 언니 3차 인터뷰        

5 a.m 노들섬

유원 언니와 함께 러닝 (2시간 소요), 나도 다시 마라톤을 시작할까 고민된다.

8 p.m 상도동

대폿집 3차 인터뷰 (5시간 소요)

비용 발생 : 34000원 (곰취 막걸리, 알밤 동동 막걸리–술이 술술 넘어간다)  


이민호 XX 새끼, 이 새끼를 어떻게 할까.

우리 유원 언니를 아프게 한 XX 염병할 놈!

그놈의 상판대기를 보러 갈 거다. 가만두지 않겠다.

유병장수 할 새끼. 평생 골골대며 살아라.

기다려. 조만간 너, 밟으러 간다.

또라이짓 할 때가 왔다.      


편집장은 노트를 주워 들고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진혜원 여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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