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은 이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당신의 삶에서 발생 확률 '0'인 사건 따윈 없다. 인간의 삶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며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본질은 변함이 없으나 사람은 변한다.
사람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마라토너 강유원은 사랑하는 이를 믿었고, 그 순수한 믿음은 무참히 짓밟혔다. 전역을 앞둔 그가 그녀에게 전한 충격적인 소식이 그러했다.
그와 함께 하던 10년의 시간과 공간에서 한순간에 그녀만 튕겨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혼자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와야 했고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속수무책으로 닥치는 실연의 아픔을 오랜 시간 홀로 견뎌내야 했다. 그녀가 달리고 또 달렸던 이유다.
아무런 힘도 받지 않고 같은 속도로 움직일 때 나를 규정하는 건 상대의 움직임이다.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다. 그녀의 삶이 멈추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그로 인해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여겼고 그와 모든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의 중심은 그가 되었다. 사랑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랑을 규정하는 건 나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에 천착할수록 그 진리를 잊고 만다.
누가 멈춰 있었고 누가 다가왔는지는 사랑에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어떤 사랑은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다. 스쳐 간 시간이 잔인할 수도 있다는 것, 오직 그것 하나만이 문제다.
평행선을 걷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 우리는 그 만남을 운명이라 하기도 하고 인연이라 하기도 한다. 어떤 인연은 필연이다. 반드시 삶의 어느 지점에서 만나야만 하는 필연이 있다. 유원 언니와 내가 그랬다. 우리는 만나야만 했다. 유원 언니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서로 겹치는 삶의 지점들이 많았다.
우리의 열일곱이 그랬다.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이혼을 했다. 엄마는 첫사랑을 다시 만났고 남은 생은 그와 함께 하겠다며 떠났다. 떠나며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다.
“사랑 없인 살 수 없어. 그것만 명심해.”
엄마는 내가 스스로를 챙길 수 있을 때까지 나를 배려했다고 말했다. 그 X 같은 배려가 눈물겨웠다. 엄마가 사랑을 찾아 떠난 그해에 아빠도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국민학교 동창이고 동창회에서 56년 만에 재회하셨단다. 아빠의 첫사랑이란다. 이놈의 집구석은 첫사랑에 한이라도 맺혀 있었던 것인가. 둘의 사랑의 결실인 나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유원 언니는 열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오랜 투병 끝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아버지는 바로 재혼을 하셨단다. 어느 곳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남자를 만났다. 고등학교 3년을 함께 했고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생활 4년, 남자의 군 복무 3년까지 언니의 삶 10년에 그가 항상 옆에 있었다. 언니의 첫사랑이었고 끝 사랑이라 생각했던 그는, 한순간에 잔인한 빌런이 되었다.
유원 언니와 나는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열일곱에 마라톤을 시작했고 남한강을 달렸다. 엇갈린 시간이었으나 같은 공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첫사랑은 이름까지 같았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겹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유원 언니의 전 남자 친구 ‘이민호’ 새끼, 나의 첫사랑은 ‘김민호’다. 나는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았다. 부모님과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지금이라도 첫사랑을 수소문해야겠다.
‘우리 미노미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마라토너 강유원 선수 : 1차~2차 인터뷰>
“그 잡지사는 왜 쓸데없이 남의 실연 이야기를 취재한대? 나 그 새끼 떠올리기도 싫어서 인터뷰 계속 거절했어. 우리 동생이 수습 딱지 떼려면 필요하다니까 하는 거야. 그 새끼 얘긴 술을 마셔야 해.”
맥주 두 잔을 연거푸 마신 강유원 선수가 말했다. 강유원 선수는 오늘 새벽에 처음 만난 나를 ‘우리 동생’이라 불렀다. 첫 인터뷰였기에 마라톤 선수로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강유원 선수는 중학생 때부터 육상부였고 주 종목은 800m였다. 마라톤은 고등학생 때 접했고 시작은 취미였다고 한다. 대회를 거듭하며 5km, 10km, 하프, 풀코스로 차차 실력을 키워 나갔다.
강유원 선수가 급격하게 실력이 향상되고 실업팀까지 들어가게 된 건 실연 이후였다. 그전까지는 10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그 새끼랑 헤어지고 나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는 거야. 밥 먹다가도 울컥하고 운전하다가도 울컥하고 밤에도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눈물이 날 때마다 달렸어. 한밤중에 잠도 못 자고 뛰쳐나가서 미친년처럼 달리고, 그 새끼 때문에 울기 싫어서 달리고 또 달렸지. 신기한 게 땀을 쫙 빼고 나면 눈물이 안 나더라고."
1차 인터뷰는 맥주를 간단히 마시며 서로의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뒤 2차 인터뷰로 우린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강유원 선수가 달릴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이유가 드러났다. 왜 술을 마셔야만 그 남자 얘기를 꺼낼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강유원 선수는 내게 거리낌이 없었고 토해내듯 자신의 지난날들을 얘기했다.
"내 인생에 남자라곤 걔 하나야. 첫사랑이자 끝 사랑. 난 그 뒤로 연애 안 해. 열일곱 살에 처음 사귄 남자친구였어. 그리고 자그마치 10년을 만났다. 내가 미쳤지. 연애를 너무 길게 했어. 그냥 확 결혼이나 해버릴걸. 같은 대학에졸업도 같이 했어. 그 새끼는 졸업 후에 바로 학사장교로 공군 입대했고 복무 기간만 3년이었어. 나 다 기다렸잖아. 그런데 전역 앞두고 마지막 4박 5일 휴가에서 그 일이 벌어졌지."
언니가 꺼낸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 새끼, 아니 그 남자는 4박 5일 휴가에서 언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언니는 뒤늦게 그 남자의 친구로부터 그가 휴가를 나왔다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분노했다. 알고 보니 휴가 내내 다른 여자와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자는 임신을 했단다. 전역 후 언니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빌었다.
“그 새끼가 얼마나 철저한 줄 알아? 나랑 10년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었어. 10대부터 20대까지 가장 혈기 왕성할 때도 말이야. 근데 군 복무 3년을 기다린 여자친구한테 전역 선물로 임신 소식을 던져준다. 개자식!”
나는 어느 시점부터인지 모르지만 강유원 선수를 언니라 부르고 말도 놓았다. 술을 마셔서 그랬던 것인지, 언니의 이야기에 격하게 공감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언니, 쓰레기 같은 새끼랑 잘 헤어졌어. 하마터면 언니가 쓰레기통 될 뻔했네. 천만다행이라고. 하늘이 언니를 구해준 거야."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언니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3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언니는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흑흑... 난 그 새끼는 잊었는데, 정말 깨끗이 잊었는데, 그 새끼 부모님이랑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언니는 소주 3병이 주량이었다. 안주도 없이 소주 3병을 병나발 분 언니는 그렇게 포장마차의 양철 테이블 위에 장렬하게 엎어졌다. 나도 언니랑 똑같이 안주 없이 소주 3병을 깠다. 나는 말짱했다. 언니는 실연의 아픔이 술을 더 독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이래서 연애 따윈 하지 않는다. 아무리 말술인들, 실연 앞에선 술도 독이 된다. 아쉽지만 2차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고 3차 인터뷰를 잡아야겠다. 3차는 대폿집이다. 막걸리는 도수가 낮으니 더 오래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3차 가자!
<세계 최강 마라토너 우리 유원 언니 3차 인터뷰>
유원 언니와 새벽 5시 노들섬에서 만나 함께 달렸다. 언니랑 달리면서 나도 마라톤을 다시 시작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달리는 묘미는 달릴수록 더 커진다. 난 달리기 맛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었다. 저녁 8시에 언니 학원 근처의 대폿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곰취 막걸리와 알밤 동동 막걸리가 기막힌 곳이었다. 우리는 5시간을 퍼마셨고 술이 술술 들어갔다.
유원 언니는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 남자의 집에 처음 갔고 부모님과 할머니는 그날부터 친딸처럼 예뻐해 주셨다고 한다. 대학 근처에서 둘 다 자취를 했고 남자의 부모님은 올 때마다 언니의 반찬까지 챙겨 왔다. 4년 내내 반찬통은 늘 두 개씩이었다.
낚시를 좋아하던 그 남자의 아버지는 큰 잉어를 잡던 날, 이게 면역력에 그렇게 좋다며 잉어즙을 내어 가져오셨다. 우리 유원이 올 겨울은 감기 걱정 말라며. 언니가 꿀꺽꿀꺽 마시자 그 남자의 어머니는 옆에서 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주셨다. 잘 먹었다고, 예쁘다고 하시면서. 자신들의 아들은 주지 말고 혼자만 먹으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하루는 홍시를 좋아한다 했더니 그 남자의 부모님은 집 마당에 온갖 감나무 모종을 가져다 심으셨다. 감을 종류별로 맛보게 해 주시겠다며. 몇 년 뒤 대봉이 열렸고 첫 수확한 감을 상자에 고이 담아 직접 가져오셨다. 냉동실에 얼려 두고 하나하나 꺼내 먹으라고. 내년에는 단감도 열리니 또 가져다주신다 했는데 그 일이 벌어졌다. 언니는 믿을 수 없는 전역 선물을 받고 바로 헤어졌기에 결국 단감은 맛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선물 받은 고가의 화장품을 자신은 이렇게 좋은 화장품은 쓰지 않는다며 좋은 건 우리 유원이가 쓰라며 가져다주셨다. 언니의 생일날은 손 꼭 잡고 백화점에 데려가 예쁜 옷을 사주셨다. 딸이 있다면 함께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주고 싶으셨다고 하면서. 할머니는 언니가 갈 때마다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꺼내 언니의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우리 손주며느리라 부르며 갈 때마다 손을 꼭 잡아주셨단다. 언니는 그 집의 딸이 된 것 같았단다. 진짜 가족이 되고 싶었단다. 될 수 있을 줄 알았단다.
“내가 제일 슬펐던 날이 언제인지 알아? 그 새끼 전역하고 얼마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갈 수 없었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 여자가 갔어. 어머니가 전화하셔서 미안하다고,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씀만 하셨어. 자신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너를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어.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잖아. 그 새낀 주워온 자식일 거야. 그렇지 않고선 그런 부모 밑에서 개망나니 같은 놈이 태어날 리 없잖아. 으흐흐흑...”
언니는 그 남자에게 꼭 찾아와야 할 게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내가 되찾아줄 것이다.
<에필로그>
혜원은 급히 <피플스> 사무실로 향했다. 7층 계단을 무서운 속도로 뛰어 올라왔다.
“편집장님! 제 취재일지요! 어딨어요?”
편집장은 숨을 헐떡이는 혜원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네며 물었다.
“여기에 무슨 중요한 내용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누구 밟으러 가시나?”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혜원은 놀라 뿜었고 생수병의 물까지 편집장에게 쏟아졌다.
“제 취재일지 보셨어요? 남의 취재일지를 왜 보세요? 기본 예의도 지킬 줄 모르세요?”
편집장은 갑작스러운 물벼락에 뿔테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았다
“일부러 본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지며 펼쳐졌습니다. 줍다가 눈이 간 것뿐이에요. 오해 말아요. 근데 진짜 밟으러 갈 생각은 아니죠?”
“만날 겁니다. 그 남자에게 돌려받아야 할 게 있어요. 마침 회사도 근처고 그 남자 점심때 회사 1층 카페에서 매일 차 마시는 거 확인했습니다.”
“진혜원 씨, 그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만납니까? 위험합니다. 회사 사규상 위험인물은 만날 수 없습니다.”
“편집장님, 다음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요? 1번, 여자 혼자 새벽 5시에 취재하러 노들섬에 가는 것. 2번, 대낮에 대로변 1층에 있는 회사 건물 카페에서 신원 확실한 사람 만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