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청년기에는 기억이 가장 강렬하고 가장 오래 남기 때문에 기억에 특별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그러나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최고의 주의력과 선견지명이 필요한데, 청년기에 습득한 교훈은 평생 기억되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기억은 가장 강렬하고 가장 오래 남는다. 그 기억에 특별세를 부과한다면 마라토너 강유원은 몇 배의 과세를 이미 치렀다. 혹독한 첫사랑의 경험에서 그녀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다음 사랑을 염원하며 열렬히 응원할 것이다. 아픈 사랑을 치유하는 길은 오직 더 깊이 사랑하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과 실연, 역경과 도전의 삶을 보름간 취재하며 느낀 것이 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달렸던 마라토너 강유원 삶은 이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삶에 찬란한 황금빛이 펼쳐지길, 어느새 나는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취재 - 진혜원 기자>
"이민호 씨! 당신 입에선 사랑이란 말이 나와선 안됩니다."
편집장의 나지막하나 단호한 분노에 나와 이민호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날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무력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찍어 누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말발이다. 말은 칼보다 강하고 상대를 더 아프게, 깊숙이 찌를 수 있다. 이 무더위에 스터드찡 박힌 무거운 가죽재킷을 입고 온 내가 어리석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민호는 <피플스> 사무실로 퀵을 보냈다. 나는 유원 언니가 찾고 싶었던 것 중에 극히 일부만을 돌려받았다. 빌런이 그날 흘린 것은 '악어의 눈물'임이 확실했다. 내가 찾아온 물건을 받아 들고 언니는 울었다. 언니가 다시는 아픈 사랑의 뒤에 혼자 남아서 슬퍼하지 않길, 나는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빌런 퇴치 D-1>
빌런을 퇴치하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지금의 내 모습으로 빌런을 만나러 갈 순 없다. 빌런 퇴치 작업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세'다. 그 녀석이 날 보자마자 단번에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 퇴근을 하고 홍대로 향했다. 홍대 입구 3번 출구로 나가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일순간에 몰려왔다. 미로 같은 골목들을 지나 제일 허름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클럽 마그마로 들어섰다.
이 클럽의 주인은 밴드 마그마의 광팬이었다. 앨범 단 한 장을 내고 해체한 밴드 마그마. 그 밴드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굳이 임대료 비싼 홍대에 클럽을 열었다. 마그마의 주인은 내 친구의 남편이기도 하다. 내 친구는 이곳에서 마그마의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대학 때부터 하드록에 심취했고 화려한 패션으로 캠퍼스를 누비고 다닌 유명인사였다. 그녀의 매번 변하는 탈색모를 보며 진심으로 조언도 해주었다.
"너 그러다 대머리 된다."
운이 좋게도 그녀는 건강한 모발을 타고났고 탈모의 징조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옷 한 벌을 빌렸다. 스터드찡 가죽재킷이다.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뾰족한 찡이 족히 50개는 박혀 있는 옷이다. 양쪽 어깨에 붙어 있으니 100여 개의 찡이 나와 함께 빌런 퇴치를 하러 갈 것이다.
"야, 한여름엔 그거 못 입어. 까딱하면 탈수 와. 이번엔 또 누구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년이 얌전히 좀 살아라. 너 그러다 감방 가는 수가 있어. 미리 말하는데난 옥바라지는 못한다~"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너 오빠 안 때리지? 형순 오빠~ 얘가 때리면 바로 저한테 전화하세요. 제가 신고해 드릴게요."
손님 테이블에 서빙을 하던 형순 오빠가 나를 보곤 씩 웃는다. 아, 좋은 사람. 어쩌다 지수 같은 애한테 걸려들어선. 사랑이 이렇게나 무섭다. 그나저나 클럽 마그마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올 때마다 한 테이블뿐이다. 딱 봐도 형순 오빠의 지인들 같다.
오랜만에 지수가 부르는 마그마 밴드의 '해야'를 듣고 마야의 '진달래꽃'을 신청했다. 전의를 다지기 위해 이만한 노래가 없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이민호, 넌 고이 못 가. 내일 넌 진달래꽃이 될 거니까. 난 널 사뿐히 지르밟는 게 아니라 짓이겨 줄 거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볼일은 끝났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지하 계단을 오르다 말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지수야, 아이섀도도 빌려주라."
지수가 무대에서 내려와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던졌다. 파우치는 포물선을 그리며 내 손에 안착했다. 쟤는 야구를 했어도 잘했을 거다. 나는 파우치를 받아 들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빌런을 퇴치하러 갈 일만 남았다.
다음날 오전 11시 30분, 광화문역 앞에서 편집장을 만나기로 했다. 여름의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었다. 날이 화창하니 참 좋다. 빌런 퇴치하기 좋은 날이다. 편집장은 좀 일찍 만나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식사를 하고 빌런이 매일 출몰하는 회사 1층 카페로 가기로 했다. 혼자 가고 싶은데 왜 굳이 따라오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쪽에서 편집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며 아연실색하는 표정이 보였다. 역시 저만큼만 다가와도 내 기세에 이미 눌려버린 것이다. 반은 성공이다.
"진혜원 씨... 이 복장은 뭡니까? 안 덥습니까? 그리고 양쪽 어깨에 뭘 이렇게 박고 왔어요?"
"편집장님, 이게 기세라는 겁니다. 위압감 느껴지시죠?"
지수가 가죽재킷을 가지라고 해서 팔꿈치 아래를 잘라 반팔로 만들었지만 역시나 더웠다. 많이 더웠다. 양쪽 어깨에 뾰족한 찡이 100여 개 붙어있으니 무겁기도 했다. 이 찡은 대체 뭘로 만들었길래 너무 무겁다. 이미 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씩 웃었다.
"헉! 눈은 또 왜 그래요? 누구한테 맞았어요?"
"맞긴요. 제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아요. 눈이 이따만하니까 무섭죠? 그쵸?"
편집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나의 화장술은 위대하다.
"진혜원 씨... 강시 같아요."
"네? 강시요? 강시가 뭐죠? 아아~ 모르고 싶은데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중국 귀신이죠? 갑자기 추억 돋아요. 강시라니, 대체 언제 적 귀신이에요. 어쨌든 무섭단 거잖아요. 그럼 됐어요!"
내가 양팔을 앞으로 뻗고 콩콩 뛰며 강시 흉내를 내자 편집장은 기겁했다. 편집장은 고개를 돌리더니 얼른 가자고 손짓하며 뒤로 돌아섰다. 빌런의 회사 근처 해장국집에서 순댓국을 먹었다. 편집장은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는지 연신 호호 불기 바빴다. 사내 녀석이 해장국도 안 먹어봤는지 먹는 것만 봐선 술도 한번 안 마셔본샌님 같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편집장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진혜원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민호 씨에게 뭘 받으러 가는 겁니까? 혹시 돈 문제입니까?"
"아니요. 큰 상자 하나 받을 게 있어요. 그 안에 유원 언니의 10년 세월이 들어 있거든요. 그걸 이민호가 가지고 있어요."
"10년 세월이라고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대체 뭐가 들어있길래..."
"종이학 천 마리, 야광별 천 개, 십자수, 언니 다이어리, 편지 수백 통, 삐삐, 마이마이 등등이요."
"아니, 지금 종이학 천 마리 돌려받으러 간다고요?"
"편집장님, 종이학 접어본 적 없으시죠? 종이학 천 마리 접는데 시간을 얼마나 갈아 넣어야 하는지 아세요? 야광별 천 개, 십자수 다 언니의 시간과 마음을 갈아 넣은 거라고요.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대학이 바뀔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하나가 더 있어요. 언니 어머니의 유품도 상자 안에 있어요. 어머니가 남겨주신 금으로 커플링을 만들었데요. 그 남자 군대 가면서 커플링 두 개 모두 상자 안에 넣었고요. 그건 꼭 찾아와야 해요."
편집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편집장을 볼 때마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다. 눈빛이 영 낯설지가 않다. 분명 본 적이 있는 데 당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찜찜했다.
'어디서 봤을까. 저 눈빛 낯익다.'
이민호는 오열했다. 본인의 회사 1층 카페에서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상자를 돌려달라고 말했을 뿐인데 이렇게 울 일인가 싶었다. 내 말을 들으며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어깨까지 들썩이며 대성통곡을 했다. 새끼가 아주 가지가지한다. 사람들이 다 우리만 보고 있었다. 내가 더 창피했다. 딱 봐도 악어의 눈물이다. 한참을 오열하던 이민호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건... 흐윽... 흡... 못 돌려줘요. 저 유원이 그때나 지금이나... 흐윽...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땐 정말 실수였어요. 남자가... 흐읍... 한순간에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무릎까지 꿇고 빌었다고요. 그런데도 유원이 뒤도 안 돌아보고 갔어요.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흐으윽... 용서도 하고 그래야죠. 흐읍...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유원이 뿐이었다고요. 저는 정말 억울해요. 흐윽... 그 상자는 유원이를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에요. 제가 평생 간직할 거예요."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빌런의 뺨을 한 대 갈겨줄 생각이었다. 내가 일어서기가 무섭게 편집장이 일어나 나를 막아섰다.
"진혜원 씨,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요. 자, 심호흡하세요. 얼른!"
편집장이 이러려고 따라 나왔다. 편집장은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자신도 앉았다. 내 팔을 꽉 붙잡았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편집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민호 씨! 당신 입에선 사랑이란 말이 나와선 안됩니다. 한순간에 변할 수도 있는 건 애초에 사랑이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고요. 평생 아물지 않을 상처 속에서 사십시오. 강유원 씨가 지난 3년을 어떤 마음으로 달렸을지 생각하면서요. 그 상자는 빠른 시일 내에 <피플스>로 보내십시오. 진혜원 씨, 그만 일어나시죠. 여기 더 있을 이유 있습니까?"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편집장을 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로변이었고 편집장의 손을 잡고 있었다. 따뜻했다. 그새 더 뜨거워진 여름 해와 그 열기를 품은 아스팔트가 내뿜는 무더위 속에서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대서(大暑)였다.
<에필로그>
진혜원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렸을때였으니 기억 못 할 수도 있는데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인터뷰이인 강유원 선수의 전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혜원을, 혼자 보낼 순 없었다. 혜원의 취재일지에서 전 남자친구의 이름을 본 순간, 잊고 있었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의 이름도 '민호'였다. 혜원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7년 전 그곳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애칭인 듯 '미노미노'라 부르던 혜원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명히 남아있다. 흔한 이름이니 동일인물은 아닐 터이나 확인하고 싶었다.
혜원에게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혜원이 입사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얼굴은 겨우 두 번 보았을 뿐이다. 혜원이 <피플스> 사무실에 올 일이 없었다. 취재 비용 정산을 매주 하라고 할 걸 후회가 되었다. 다음달부터는 취재 비용을 매주 금요일마다 정산하라고 전할 참이었다.
혜원과 만나기로 하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 일찍부터 평소 입지 않았던 셔츠와 정장 바지를 꺼내놓고 고민에 빠졌다. 너무 오버하는 것은 아닐까. 평소처럼 캐주얼을 입어야 할까. 결국 입던 옷을 입고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와서 주변을 서성였다. 혜원이 나타날 지하철 입구만 멀리서 지켜보았다.
드디어 혜원의 모습이 보였다. 혜원은 이 더위에 가죽재킷을 입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을 보자마자 놀라고 말았다. 너무 놀라 입도 고장이 났다. 그녀에게 강시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강시 흉내를 냈다. 그녀는 여전히 귀여웠다. 어렸을 때도 귀여웠고 지금도 귀엽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서재의 서랍 안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단 한 장뿐인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