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졸 졸졸…….’ 계단을 따라 물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위층에서 물 내려온다. 계단 청소하자.”
지금의 나보다 젊은 엄마의 목소리에 우린 플라스틱 빗자루를 들고 계단과 마당 청소를 했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억을 언니나 엄마의 기억을 빌어 추억하곤 한다. 이런 나에게도 드문드문 부분적으로 기억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초. 중학교 시절 살았던 빌라에서의 비빔밥에 대한 기억이다.
18세대로 구성된 한 동짜리 3층 빌라로 1층에 살았었다. 1~2호 6세대와 3호 3세대, 아홉 개의 지상세대와 지하 9세대가 있는 구조였다. 그 앞으로 차를 이중으로 6대 정도 세울만한 넓이의 마당이 있었다. 오래전이라 정확한 넓이가 가늠이 안 되지만 배드민턴도 치고, 자전거도 타고 했으니 꽤 넓었던 거 같다. 당시엔 각 집마다 차가 있는 시절이 아니어서 마당을 아이들 놀이터로 사용했다. 지금이라면 주차 전쟁이 벌어졌을 공간이다. 그 한 동짜리 빌라 18세대에 내 또래 아이들이 꽤 많았었다. 한집에 보통 2~3명의 아이들이 있었으니 그 작은 빌라 땅 덩어리에 북적거리며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선 매주 토요일마다 엄마들이 계단 물청소와 마당청소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이웃끼리 서로 사이도 좋았고 다들 참 깔끔하고 부지런한 분들이었구나 싶다. 매주 집마다 돌아가며 호스를 끌어다 수도 연결해서 계단청소에 필요한 물을 사용했고, 물청소가 끝나면 집집마다 돌아가며 한집은 된장찌개, 또 한집은 보리밥, 또 다른 한집은 나물을 해서 마당 평상에서 큰 양푼에 재료들을 넣고 비빔밥을 해먹었던 기억이 있다. 매주는 아니어도 종종 했던 거 같은데 기억력이 안 좋은 나의 기억에 남아있는거 보면 그때의 추억이 좋았나보다. 대부분의 사람이 좋은 기억을 오래 유지한다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나 역시도 나쁜 기억은 빨리 잊고 싶은 맘 때문인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래야 살아지니까…….나쁜 기억을 오래 유지하고 살면 서로가 서로에게 원망만 쌓이니까…….
생각해보면 그 당시 물청소를 끝내고 마당 평상에서 먹었던 비빔밥에 어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갔겠나 싶다. 나물도 분명 손 많이 가는 특별한 나물이 아니었을 텐데 그때의 비빔밥이 기억이 나는 건 분명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맛은 기억에 없다. ‘그때 그랬었지~’의 기억이 있을 뿐…….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비빔밥을 만들어 봐야겠다. 냉장고를 뒤지니 시장서 사온 겨울무가 있고, 표고버섯과 참나물이 있고, 냉동실엔 삶아서 소분해둔 시래기나물이 있다. 그리고 강원도 정선 5일장에서 사온 ‘건 취나물’과 ‘건 곤드레나물’이 있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취나물’ 과 ‘건 곤드레 나물’은 물에 담가 충분히 불린다. 불린 취나물과 곤드레를 각각 삶아준다. 취나물은 삶아 물에 두 번 정도 깨끗이 헹궈 물기를 꽉 짠다. 푹 삶아 부드러워진 곤드레도 물에 두 번 정도 깨끗이 헹궈 물기를 꽉 짠다. (푹 삶은 후 그 삶은 뜨거운 물에 몇 시간 담가두면 부드러운 식감의 곤드레 나물을 먹을 수 있다.) 준비된 취나물과 곤드레에 각각 다진 마늘과 간장, 참치액을 넣어 조물조물 버무린 뒤 강불 에서 볶고 약불에서 조금 더 시간을 두어 양념에 베도록 한다.
무는 채를 썰어 준비한다. 반은 고춧가루, 멸치액젓, 설탕, 다진 마늘을 넣고 버무려 무생채를 만든다. 반은 강불에서 다진 마늘, 소금, 들기름을 넣고 볶다가 불을 중불로 줄이고 뚜껑을 덮어 살캉살캉 식감으로 익혀준다.
표고버섯은 채를 썰어 다진 마늘과 소금을 넣어 살짝 볶아준다. 취나물은 양파를 얇게 채 썰어 들깨드레싱으로 함께 버무려 준다.
시래기는 줄기 부분의 겉껍질을 벗겨주면 부드러운 나물을 먹을 수 있다. (벗기지 않으면 질겨 식감이 좋지 않다.) 손질된 시래기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썬 후에 된장, 다진 마늘, 설탕, 간장, 들기름을 넣어 조물조물 버무린다. 버무린 시래기나물은 물을 자작자작하게 넣은 후 강불로 끓여주고 중간불로 줄여 간이 베게 해준다.
고추장은 물과 설탕을 넣어 비빔밥에 맞는 농도로 준비한다.
비빔밥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계란후라이는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준비한다.
모든 재료가 다 만들어졌으면 예쁜 대접에 밥을 담고 그 위에 나물을 조금씩 올리고, 포인트로 준비한 계란후라이를 올려준다. 각자의 기호에 맞춰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을 한 바퀴 돌려주고 맛있게 비벼준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입맛을 자극한다. 맛있게 비빈 밥을 나물과 함께 한숟가락 듬뿍 떠서 입에 넣으면 매콤한 고추장과 각종 나물의 조합이 환상이다. 나물이 그득한 상차림은 보기만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물을 다 먹을 때까지 비빔밥만 주면 아이들은 싫어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