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1주년을 앞둔 지금, 엄마가 본가에 있던 내 짐을 가져다주었다. 14살부터 23살까지의 내가 9개의 상자에 담겨 신혼집으로 들어왔다.
사흘동안 하루에 세 상자씩 정리했다.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에 글짓기로 받은 상장을 찾았고, 대학교 2학년 때 교양 과제를 묶은 제본집도 발견했다.
한창 레진공예를 할 적에 모아뒀던 부재료도 찾았다. 글리터 종류는 레진공예를 접으면서 네일아트를 하는 친구에게 주었고, 남은 건 '부재료'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지는 것들이었다. 황동색 브로치 부자재 같은 거. 나는 물건을 버리는 것도 잘 못해서 내 손에 들어온 지 8년쯤 된 브로치 부자재를 8년 뒤까지 못 버리고 안고 살 것 같았다.
물건을 좀 버리기로 했다. 다짜고짜 집히는 대로 쓰레기봉투에 처박는 건 아니고, 인정을 하는 거다.
색이 바랜 실리콘 몰드를 보며 '나는 끝까지 레진으로 만들고 싶은 걸 찾아내지 못했어'하고,
열 장씩 묶어둔 이면지를 보며 '이제 이면지를 사용할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노트가 아주 많고, 더 이상 수학 문제집을 풀지도 않으니까'하고 인정하는 거다.
이제 촌스럽게 느껴지는 싸구려 원피스는, 언젠가 실내화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남겨두었다. 이래서 물건을 잘 못 버린다. 언젠가는 뭔가 될 것 같아서.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묶인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정리했다. 일부는 창고에 들어갔고, 생각보다 많이 버렸다.
이미 물건으로 가득한 방에 또 물건이 들어왔다.
꾸역꾸역
꾸역꾸역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 물건을 밀고 당겨 꾸역구역 빈틈을 만들어 물건을 쌓아야 했다.
정말 두려운 건 아직 본가의 짐이 다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온 것과 엇비슷한 양이 또 올 예정이다.
정리해야 한다. 나는 물건을 너무 모아두는 기질이 있다. 책, 노트, 재료 같은 것들을 한 무더기씩 안고 산다. 나의 지난 글들을 본 이라면 그리 놀랍지도 않겠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소진하기.
자격증 시험에 붙은 뒤, 내가 시험 대비 교재들을 정리했듯이. 쓸모를 다 하고 나면 안고 있을 필요가 없다.
내가 꾸역꾸역 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아직 쓸모를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리되지 못한 것들인 셈이다.
제 쓸모를 해내고 나면 정리할 수 있을 테다. 물건도, 마음도,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대학시절 교재는 버릴 수가 없다. 강의에서 모든 챕터를 다루지도 않았으며 내가 그 속에 담긴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복습하고, 한 권의 노트로 정리하기. 그 뒤에는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뜨개질 레시피북. 이제는 누구의 도안을 보면서 뜨개질을 하지 않는데도 책이 많다. 모든 인형을 만들어보기. 그 정도면 쓸모를 다 했다고 할 수 있겠지.
한국어능력시험과 토익과 제과제빵기능사 교재는 다 풀어버리자. 결과가 어찌 되든 응시해 버리자.
그리고
나는 뭐든 잘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뭐든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뭐든' 잘하는 사람.
근데 뭐든 잘해내기에는 내가 조금 덜 성실하고 영민해서 그냥 뭐가 많은 사람이 되었군.
이 글을 저장함에 보관한 지 일주일. 엄마가 본가에 있던 내 짐을 또 가지고 오셨다. 이번에는 일곱 상자.
아뿔싸.
더 물건을 둘 곳도 없는데, 하고 우는 소리를 하며 내 몸뚱이만 한 돌고래인형을 빨았다. 이번에 들어온 짐에 들어있던 인형으로, 내가 열대여섯 살 즈음 산 거다.
너는 세탁기에 넣을 수 없어, 언니네 세탁기 9키로짜리야, 봐
너는 한평생 집구석에만 박혀있던 애가 어쩜 이렇게 구석구석 때가 탔니. 전시만 해놨는데
생각해 보니 너 살면서 오늘 처음 목욕하는 거겠다, 아이 드러
그러면서 클렌징폼을 거품내어 인형을 박박 긁어 빨았다. 잘 빨고 말려서 소파 위에 얹어둘 생각이다. 아무래도 다음번 시내에 가면 아름다운 가게에 다른 인형들을 맡겨야겠어, 이 커다란 인형이 들어왔으니 다른 인형들은 정말 둘 데가 막막하네, 나름의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