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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 Apr 26. 2024

어떤 부모의 흔한 착각

자식의 입장에서 말하는

사주를 보면 늘 나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한다. 불용자를 쓰고 있다고.

엄마는 나의 개명을 극구 반대한다. 엄마뿐만 아니라 외가 식구 모두가.

내 이름을 지어준 건 나의 외할아버지인데, 나야 루게릭으로 병상에 누워 계신 모습만 기억하지만 보다 정정할 적의 외조부께서는 박식한 분이셨다고 한다. 침술이나 작명 같은 것들을 했다고 하는데, 아니 그런 분께서 왜 손녀딸 이름에 불용자를 쓰셔?

외가 식구들과 있는 자리에서 내 이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말했다.


'아름다울 미'가 부모복이 없는 한자래요.

그래?

근데 봐, 나 부모복이 없잖아.

야, 네가 무슨 부모복이 없어? 이거 웃기는 애네.

아니 부, 모, 복인데 부모 중에 '부'가 없으면 없는 편이지. 최소 반절은 없는 거지, 이모.


나는 아빠라는 글자가 닳고 닳을 때까지 그를 끄집어내고 욕하는 것으로 나를 위로하는데,

어른들은 그의 존재를 침묵 밑에 숨기고 그나마 좋은 점만을 회상하는 식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부친의 부재에 대해 운을 띄었을 때, 침묵이 딸려 나왔다.


근데 요즘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애초에 할아버지는 아빠를 보고, 내가 부모복이 없을 걸 알았던 게 아닐까? 그래서 어차피 없을 부모복, 이름 탓이라도 하라면서 나한테 그 한자를 준 건 아닐까?

그 한자가 부모복 빼면 좋은 한자일지도 모르지. 어차피 아빠 때문에 부모복은 별로니까 그건 땜해버리고 좋은 뜻만 남은 걸지도 모르지.


십수 년 전에 돌아가신 분 생각이야 이제 와 알 방도가 없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아빠는 원래부터 남편으로도 아빠로도 별로인 사람이었고, 나한테 어떤 귀한 한자를 가져다 붙여도 그는 변하지 않았을 거다.




아빠는 전형적인 나쁜 아빠였다.

행복한 가정은 다들 엇비슷한 모양이고, 불행한 가정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지만 그 저마다 다른 불행 속에도 '전형적이고 진부한' 모습이 있지 않나.

아빠가 우리 가족에게 어떻게 별로인 사람이었는지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 이야기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형제가 공유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만의 프라이버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이고 다혈질에다가 술과 게임을 좋아하고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 무책임하고 생각이 짧은 쾌락주의자. 봉사단체에서 일했었고 개농장을 운영한 적 있으며 제빵사이기도 하다. 좌우대칭으로 못생기고 내가 실제로 본 사람 중에 제일 못생겼다는 서글픈 사실은 뒤로 하고, 마음마저 못생겨서 가까이 있으면 기가 쭉 빨린다. 자기 잘못 지적받는 걸 싫어하고,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사람. 자기 과거를 죽 늘어놓고 그중 제 마음에 드는 순간만 붙잡고 평생을 산다. 상도덕이고 도의고 예의고 뭐 하나 아는 게 없으며, 살아생전 양육비 한 번 준 적 없고 십오 년 가까이 안 보고 잘만 살았으면서 자식들 밥벌이 시작하니 연락하고 살고 싶다고 내비치는 염치까지 없는 사람.


앞서 내가 권태로울 정도로 순조로운 삶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내가 진부할 정도로 비호감인 인물의 이야기를 상상해야 한다면 나는 아빠를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백 명의 인물도 만들 수 있다.

그가 나에게 남겨준 단 하나의 선물이다. 내 삶에 가득한 좋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나쁜 인물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대본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여럿 담겨 있다. 가장 큰 주제는 '나'에 대한 정의지만 인물 간 관계마다 이런저런 작은 메시지들이 깔려 있다.

그중에 하나는 '자식의 입장에서 말하는, 어떤 부모들의 흔한 착각'이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나도 부모가 처음이라서, 자식이 부모의 세상이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만큼 맹목적인 게 없다 그런 말들.

나는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그게 철저히 부모 입장을 대변하는 일종의 착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찍 철든 열서너 살의 마음을 기억하는 철딱서니 없는 스물 후반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철저히 자식 입장에서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내가 원한 건 좋은 부모가 아니라 '좋은 사람인' 부모였고, 그래서 부모가 처음이어서 그렇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부모는 처음이어도 사람으로서는 수십 해를 살았으니. 좋은 사람까지도 아니고, 괜찮은 사람-나쁘지 않은 사람 정도만 돼도 괜찮다.

사촌오빠를 통해 '아빠가 없어서 좋은 아빠가 어떤 건지 몰랐다'는 아빠의 변명을 전해 들었을 때는 어이마저 없었다. 좋은 아빠는 바란 적도 없는데 무슨 좋은 아빠 해보려다가 실패한 사람처럼 말을 얹는담. 한층 괘씸해지게.


나는 아직 아빠를 사랑했던 여섯 살, 열한 살, 열세 살의 마음을 똑똑히 기억한다.

세상은 자식이 부모 세상의 전부고, 부모가 아주 맹목적으로 자식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리고 우리 엄마와 뭇 어른들을 봤을 때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어딘지 마음이 불편한 건 이게 너무 편파적인 이야기여서인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 인어공주 만화영화를 이야기하며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을 무를 정도로 인어공주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걸 보는 것 같다. 인어공주가 자기 꼬리와 목소리를 포기하고 뭍으로 올라올 정도로 왕자를 사랑한 이야기는 쏙 빼고, 그 얘기만 하는 걸 보는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첫 십 년, 못해도 십 년은 자식에게 진짜로 부모가 말 그대로 세상이고, 그래서 맹목적으로 믿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기다. 부모가 말하는 자식 사랑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주어가 고정된 채 통용되는 그 구절들이 사실은 쌍방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 소설과 대본에는 그런 생각들이 많이 담길 것 같다. 구태여 소리 내지는 않는, 나 닮은 이들의 날 것들.




추신 1

원래 내 성씨는 이 씨인데, 이게 내 사주 재물복을 막는 한자라고 한다. 이 양반, 진짜 뭐 하나 제대로 준 게 없구만.

추신 2

엄마 성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오빠가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해 버려서 반대당했다. 아무래도 형제끼리 성이 달라질 수는 없으니까.

추신 3

석 자 밖에 안 되는 이름 중에 33%를 물심양면으로 직무유기한 이에게서 받아오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 자 밖에 안 되는 귀한 이름인데, 그런 식으로 채울 수는 없다. 하여 친구들에게는 엄마 성을 붙여 정00으로 부르도록, 원치 않는 어른들은 성 떼고 이름만 부르도록 요청했다.

이상 TMI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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