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이얼을 조작하는 데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 간파할 수 없는 장난감들이 있지 않나. 나에게는 그게 워터게임기, 다마고치 그리고 에치 어 스케치였다.
요즘 알고리즘이 에치 어 스케치를 추억의 장난감으로 종종 띄우는데, 다이얼 두 개로 사람이며 풍경을 감탄이 나오게 그리는 사람들은 보면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다이얼을 빙글빙글 돌리는 것만으로 선이 갈 길을 알고, 어떤 밑그림도 없이 아름다운 결과물을 또렷하게 만들어내는 걸까?
당장에는 그냥 방황하는 한 가닥 선일뿐인데 그게 모여 선명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복선과 메타포와 맥거핀이 화려하게 수 놓인 서사물을 보는 것 같다. 내게는 단편에 불과했던 수많은 요소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견고한 짜임을 갖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떻게 그 좌표 없는 모래판과 도처에 깔린 복선과 어지러운 맥거핀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나?
생각해 보면 거의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것들은 당장에는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삶이 그런 것 같다. 의도하기 힘들고, 흘러간 줄 알았던 사람들과 상황들이 끈질기게 따라붙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고작 한여름밤의 무게이기도 하고.
당장에는 모르지만. 멀리서 혹은 훗날에 내 삶을 돌아보면 나름의 색, 결, 형태, 의미 같은 것들이 보인다.
못나게 튀어나온 선이 지나고 보니 꼭 필요한 걸 수도 있고, 의미 없는 사건이 온 서사를 관통할 수도 있고. 의도하기 쉽지 않은 것들.
그래서인지 나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격려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린 것도 서러운데, 내가 잘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 어떡해요? 마음은 성급하고, 성과는 느리적거리고, 방향마저 갈팡질팡이면 나는 어떡해요.
느리고 서툴고 마음이 조급하고 방향이 의문스러워도 괜찮다고 해줘요, 그냥.
느린 걸음이어도 정체하지 않는 게 기특하고,
원래 사람은 누구나 서툰 구석이 있고,
마음이 조급한 건 느리고 서투른데 잘하고 싶은 의지가 있으니 당연한 거고,
방향을 잘못 잡았으면 조금 튀어나와도, 갔던 길을 되돌아와도 다 괜찮다고.
다이얼 돌리는 게 서툴러서 그림이 엉망이 되더라도
허공에 한 번 흔들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
나는 아직 나의 속도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내가 걷는 방향에 확신도 없다. 어쩌면 내가 옳다고 믿는 선택 태반이 그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 끝에 그냥 허무만 남을까 봐 두렵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본능적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 같다. 단정되는 게 무섭다고 말하는 나조차도 나도 모르는 새 누군가를 평가한다.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그냥 존재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해체하고 편집해서 선택한 의미가 무의미하고 무례한 걸 알면서도.
나는 엄마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왜 아빠랑 결혼했을까? 엄마가 조금 더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면, 차라리 얼굴 뜯어먹고 살 작정으로 사람을 만났더라면, 책임감이 조금 약했더라면. 그러면 엄마는 지금보다 조금 더 편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조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우스개처럼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외가 식구들은 다 인물이 좋은 편인데, 엄마가 잘생긴 남자랑 나를 낳았더라면 내가 얼마나 더 예뻤겠어'하고.
그러면 엄마는 말했다. 이 미련퉁아, 그러면 네가 태어나지 못했겠지. 태어난 게 네가 아니었겠지.
옛날에, 외갓집이었나. 엄마가 술을 엄청 많이 먹은 날이었다. 엄마는 술을 먹으면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술주정이 있다.
그날 어떤 이야기가 오갔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엄마가 주정으로 한 말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 말을 듣고서 나의 판단과 평가와 내가 찾는 가치가 오롯이 나의 기준일 뿐이고, 아주 무의미하고 어쩌면 오만한 낭비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엄마가 말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했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건, 애들을 만나게 해 준 것만으로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 너무 감사해.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 사람이 자기 인생에 얼마나 큰 오점이건 간에, 그로 하여금 우리 남매를 세상에 있게 했으니 다 됐다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감사하다고.
나는 엄마가 다이얼을 잘못 돌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본 그림과 내가 본 그림이 달랐던 거다.
나는 엄마의 다이얼이 조금 더 평안한 엄마의 삶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엄마는 모래판 위에서 제 자식들의 얼굴을 봤다.
어쩌면 나는 내 삶에서도 엉뚱한 그림을 찾으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엉뚱한 선을 긋고 있을지도, 옳은 선을 되감고 있을지도. 인생살이 쉽지 않군.
근데 그래도 그냥 괜찮다고 해주자, 조금 엉성하고 바보 같고 때로는 무례해도, 이제라도 알면 됐다고 가볍게 구박하고 도닥여주자.
나는 세상이 나에게 그랬으면 좋겠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싱겁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으니까.
추신. 화요일에 브런치 발행을 하긴 했는데 글쎄, 브런치북 설정을 안 해놨다. 역시 엉성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