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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May 27. 2024

응보(應報)

안갚음과 앙갚음에 맞대응하여 되갚음

[3응보(應報)

응보 실마리

응보의 뜻

갚음에는 보통 되갚음이 행해진다. 가행자에 대한 피행자의 되갚음, 또는 일정한 업보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주고받는 것을 응보(應報)라고 한다. 보상 정애는 가행자에 대해 피행자의 대응인 응보가 이루어진다는 특성이 있다. 응보는 보상 정애의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보상이라는 이름도 바로 이 특성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이 장(章)의 맨 앞에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지적한 것이 이것이다. 여기에서 응보라 함은 피행자가 가행자의 침훼를 받아쳐 갚는 행동을 가리킨다. 


응보에는 〘심리적 응보〙와 〘윤리적[도덕적] 응보〙가 있는데 심리적 응보는 심리기적 의지에 의한 보상이고 도덕적 응보는 선행이나 악행으로 여겨지는 행동의 원인으로서의 윤리기적 의지에 대한 보상이다.  

    

응보는 받아쳐 갚는데 대해 다시 받아치면서 이어지는 특성이 있다. 곧 한 차례의 가행 보상에 대해 응보하면 응보를 당하는 사람이 이를 가행에 대한 응보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가행으로 여겨 이에 보상하려 한다. 이처럼 응보에 응보가 그치지 않고 널리 퍼져나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되풀이 되는 현상이 이어진다.  

    

위에서 논의한 것은 거의 모두 심리적 응보에 관한 것이다. 감정 전부가 그러하고 정애 또한 그 내적 반응이 의식의 단계에 따라서 생리적 정애ㆍ심리적 정애ㆍ도덕적 정애로 구분되듯이 보상심리도 이에 대응되는 3종류의 정애, 곧 생리적 응보심리적 응보윤리적 응보로 나눌 수가 있으나 생리적 응보는 굳이 구분하자면 제시 본성에 들어서서 상대적인 우열의 결과를 일으키게 한 대상에게 지향되는 심리적 보상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대아(大我), 곧 자기의 존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상에게 지향되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에 관해서는 초들지 않고 나머지 응보인 [심리적 응보]와 [윤리적 응보]에 관해 설명해 보려 한다.  

    

심리적 응보 

심리적 응보의 뜻

심리적 응보는 대상에게 심리적인 효과를 지워주려는 의도에 따라 상대에게 긍정적 정념이나 부정적 정념을 일으켜 되갚아 주려는 보상이다. 곧 긍정적인 대상인 은인에게는 그에 따른 긍정적인 정념을 일으켜주고 부정적인 대상인 원수에게는 부정적인 정념을 지워준다. 


응보의 방법과 내용 및 강도 등은 가행자와 피행자의 처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보상심의 집요함은 때때로 보상자 자신까지도 놀라게 한다. 보상자 자신이 피곤하거나 연민 때문에 보상을 포기, 또는 축소하려고 해도 그의 본능은 이를 허락하지 않음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보상 정애가 집요하고 강인함을 적어도 잠재적으로라도 알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남에게 대한 자기의 보상에 대해서도 그로부터의 집요한 응보가 있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그가 보상의 행동 주체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논리로 자신이 보상 행위의 표적으로서의 대상자인 피행자일 수도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보상이 집요하고 강인함과 같이 응보 또한 집요하고 강인할 것임도 넉넉히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은혜를 베푼 자는 대개 보은을 예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대하며, 남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상대방으로부터 보복이 있을 것임을 예상한다. 


다만 은혜를 베푼 자는 은의를 입은 자가 형평의 원리에 적합한 분량으로 보답해 오지 않으면 대개 배은망덕하다고 비난하거나 분노하는 데 대해 가해자는 피해자로부터의 응보를 예감하기는 할망정 결코 바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뒤의 [선보(先報)] 항목을 볼 것.     


사사로운 응보 금지 

보상 정애는 인간의 정의(正義) 개념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 점이 말해 주듯이 보상 정애는 사랑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는 예로부터 사회적 분쟁의 진원이기도 한 이 정애의 조정을 통해 강제적인 권력과 법 제정으로 이를 지키고 그에 반한 위반, 곧 불의를 없애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법적 조정의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법적 조정의 필요성은 더 크게 다가왔다. 현대의 모든 국가에서 보상 정애, 그 가운데 냉보인 당가 보상 정애에 대해서는 민법을, 열보에 대해서는 형법을 제정해 대처하고 있다. 


오늘날의 소위 문명사회에서는 개인적인 보복이 법률로 금지되고 가해자에게 형사적인 책임을 지우는데, 그것도 응보적 징계(응징)가 아니라 선도(善導: 교도(矯導))의 의미로서 부과ㆍ종결시킨다. 이런 제도는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보상 정애의 지ㆍ정ㆍ의적 정신 현상으로 인한 사회적 분쟁을 조정하여 완화시키려고 개체의 자의적인 보상 행위를 제한하고 그 일을 국가가 공정히 대행하겠다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응보의 연쇄로 야기될 사회의 분란과 불안을 방지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법률 제정과 제공으로도 본성적 보상 정애의 미묘한 심신 상태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개개인의 보상이 만족스럽게 해소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피행자 자신의〘설분〙에 완벽한 효과는 나지 않는다. 


다만 무력한 개인이 거대한 위력을 지닌 사회의 보복 금지 조처에 대항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앙분의 해소가 미진한 채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도 직접적 보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고 보상 심리를 변용하여 설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개인은 국가 권력이나 법령의 범위를 벗어나 사형(私刑)을 통해 보상하기도 한다.      


윤리적 응보

윤리적 응보의 뜻

윤리적 응보란 허물[죄(罪)], 곧 잘못에 대한 법적 처벌과 하늘로부터의 처벌인 [천벌]을 가리킨다. 


곧 도덕성에 따라 일어나는 응보로 착한 사람에게는 복락이,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내려진다고 믿어져 흔히 “착함을 쌓는 이는 경사스러움이 남으며[적선자 필유여경(積善者必有餘慶)이요,]” “악을 쌓는 자는 재앙으로 남는다[적악자 필유여앙(積惡者 必有餘殃), 또는 “착함을 쌓지 않은 집안은 반드시 재앙을 남긴다.”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不善之家는 必有餘殃)] 이라는 대중적 표상에 따르는 응보를 가리킨다.


보상은 정애의 연장으로서 마음속의 의식일 뿐만이 아니라 그 의식이 남에 대한 행동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부정적 보상일 때 이는 심각한 사태로 발전되기 쉽다. 보상 행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에 다시금 [응보(應報)]로 대응하기 때문에, 사소한 불씨 하나가 대화재를 불러오는 수가 있듯이 사소한 보상 행위도 이것이 사회적인 대사건으로 확대될 수가 있는 것이다.

      

도덕적 보상의 기준이 되는 업행인 선행과 악행을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개념상의 일일 뿐 실제의 사례에서는 그다지 뚜렷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리적 의식 자체가 본래 광의의 제시 본성의 아랫자리 의식이기에 이를 굳이 구별한다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심리적 응보와 윤리적(도덕적) 응보는 개념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 구별에 충분한 유의성(留意性)이 있다고 생각된다. 심리적 응보는 행위 내용의 정당성이 어떠하거나에 불구하고 피행자가 입은 정도에 어울리는 정애의 내용에 따라 지향된다. 


그러나 도덕적 보상은 〘피행자〙의 심리적 결과가 아니라 〘가행자〙의 도덕성이 보상 부과의 제1차적 기준이 되는 점에서 심리적 보상과 크게 다르다. 심리적 보상을 당연시하는 인간은 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보상이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도덕적 보상이, 보상을 부과하는 기준을 가행자의 도덕성인 선악에 두는 점에서는 서로 다른데, 다만 가행자에게 귀착될 결과가 다 같이 심리적 정애에 속한 복락과 재앙이라고 믿는 점에서는 같다. 그래서 심리적 보상이 피행자에게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 가행자에게 괴로움을, 긍정적 결과를 초래케 한 가행자에게 즐거움을 주려 함에 견주어 도덕적 보상은 보상의 결과가 아니라 업의 동기인 선악에 관한 보상이 된다. 


곧 [선행자(善行者)]에게 복락(福樂)이라는 〘긍효〙로움이, 그리고 [악행자(惡行者)]에게는 앙화(殃禍)라는 〘반효〙의 괴로움이 부과될 것으로 표상한다.     


보상과 정의의 관계

보상 정애는 감성[감정]에 속하지만, 그에 의해 야기되는 보상 행위는 의지에 속하고 더구나 은혜를 베푸는 천성이 속임수 없는 시여라면 결과에 불구하고 고맙게 느껴지고 보상의 공평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공정]성이 훼손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악업에는 악과가, 선업에는 선과가 표상된다는 점에서 도덕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회집단의 규범을 어긴 사람에 대한 처벌이나 공적을 쌓은 사람에 관한 포상은 도덕성이 깊이 작용한다.     


[부정성]

안갚음과 앙갚음은 모두 “한 굴대에 두 바퀴”와 같은데 앙갚음은 아무리 보상이라 하더라도 남의 행동성을 침훼하기 쉽다는 점에서 도덕이라 하기엔 부족하다. 특히 보상이 [도덕적 의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도덕적 정의가 보상이나 보상 요구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도덕적 정의가 없거나 훼손될 수 있는 보상 ⸺정치적 공훈 시여 등⸺ 이나 보상의 요구 ⸺공훈에 대해 급부를 요구하는 행위⸺ 는 오히려 사도행(邪道行)이다.


 적선자는 흥하고 적악자는 망한다는 대중의 기대는 긍효 없는 시혜여야 한다는 선행의 기본 원칙(?)에 어그러진다. 본질적으로 이타심인 선행은 대가가 없을 때 진정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법률과 정의의 보상

보상 정애는 인간뿐만 아니라 생물 전반 특히 동물들에게도 나타나는 가장 범위가 넓은 정동(情動) 현상으로, 인간의 정의(正義) 개념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사랑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는 예로부터 사회적 분쟁의 진원이기도 한 이 정애의 조정에 고심해 왔다. 위에서도 잠깐 초든 바 있지만 국가는 강제적인 국가 권력과 법 제정으로 이 정의를 지키고 그에 반한 위반, 곧 불의를 없애고자 심혈을 기울여 왔다.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법적 조정의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법적 조정의 필요성은 더 크게 다가왔다. 현대의 모든 국가에서 보상 정애, 그 가운데 냉보인 당가보상 정애에 대해서는 민법을, 열보에 대해서는 형법을 제정해 대처하고 있다.      


형법과 민법에서는 대개 형법의 많은 부분이 열보에 관한 보상의 규정으로 되어 있으며, 민법의 물권법ㆍ 점유권법ㆍ 소유권법ㆍ 그 밖의 많은 부분이 냉보에 관한 보상 규정으로 되어 있다. 


법적 심판에 따르는 대리 보상과 본래의 보상 정애의 해분 차이와 그 틈 ⸺법적 심판이 보상을 만족할만하게 해소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불만인 개인은 남아 있는 보상 정애⸺ 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나 법령의 범위를 벗어나 사형(私刑)을 통해 보상하려 하기도 한다.     


도덕적 응보 심판자

그런데 사람들의 도덕적 보상 정애에서 도덕적 업에 대한 보상에는 업의 내용이나 가치를 평가하여 그에 합당한 보응을 내려줄 초자연적 능력의 심판자(審判者)가 있어서 공정하고 공평한 판결을 내려줄 것으로 믿는 강한 기대가 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주관자[심판관]는 자기의 주관(主觀)에 따라 공의에 어긋나는 편파적인 판결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도 한다. 따라서 그럴 위험이 다분히 있는 범속한 존재가 도덕적 응보의 주재자로 상정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에 도덕적 응보로서의 상벌의 주재자는 세속을 초월한 [공의로운 존재]일 것이 요구되며 또 그렇게 상정된다. 공의로운 자 ⸺도덕성이 뛰어난 자⸺ 는 도덕적 판단력이 뛰어나서 공평무사하게 업의 선악을 판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합당한 과(果)를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능력의 심판관이나 주관자로 신(神)이나 하늘(천: 天)ㆍ부처(불: 佛)ㆍ상제(上帝) 등 예지계의 신령한 존재나 그 대리자, 또는 군왕ㆍ성현 등의 예지적 영도자를 표상한다.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는 긍효가, 그리고 악행에 대한 보상으로는 반효가 내릴 것이라는 표상은 인류의 오랜 관념으로서 지금도 이런 이념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바이다. 이는 권선징악적 관념에서 연유하며 도덕적 보상도 당가 원칙에 따라 선악에 해당되는 당연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본성적인 보상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성에 어긋난 행동에 관해서는 자신이 직접 피행자[피해자]가 아닌 일반인조차도 피행자의 입장에 서서 공분을 느끼고 정의에 입각한 공의로운 판단이 내려지기를 바라며 그러한 공정한 판단이 내리면 도덕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앙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본질적 교리가 어떠하거나에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이와 같은 복(福)을 비는 관념이 그들의 명맥을 유지케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보상이 현세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경험하더라도 이 관념을 결코 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승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보상은 저승에서라도 기필코 이루어질 것임을 믿으면서까지 그 타당성의 관념을 유지시키려 할 정도로 강한 것이 이 윤리적[곧 도덕적] 보상 관념이다.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만약에 이러한 응보가 없다면 저 증오해야 할 악행을 어떻게 앙갚음해야 할 것이며 왜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한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가셔지지 않는다. 


선에 대한 복락의 보상보다 더 중시되는 것은 악에 대한 재앙의 보상이다. 악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사마천이 피력했던 바[574쪽 참조]와 같이 큰 공허함을 느끼고. 통탄한다. 


대중은 선악의 행위마저도 철저히 복락의 추구를 위한 응보의 수단이라고 믿고 있으며 윤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당위적 과오를 흔히 용서를 빌거나 위로해 주거나 금전적으로 보상해 주는 등의 심리적 보상으로 상쇄시키기도 하는 것이 뿌리 깊은 보상 정애적 관념이다.


응보의 고리

계속되는 응보

그런데 보상과 그 응보로서의 이 행동은 끝이 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보상에 대한 응보에 다시금 응보가 이어져 응보가 반복되는 것이 보상의 속성이다. 보복이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등 응보의 악순환이 한둘이 아님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보상심의 발현이나 [형평 원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도 그것은 대개 관념적인 생각일 뿐 실제에서의 보상의 정도를 공정하게 판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행위가 상대방의 보상 정애를 촉발시킬 요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도 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행자에 대한 피행자의 행위는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주관적인 편견이나 경쟁적 역리 감정에 입각한 것으로는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체로는 대방의 보상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사태를 일단락지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보상을 각오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상대방의 보상 분량이 형평의 원리를 벗어나는 과다한 것으로 의식하고 그 초과 보상분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일도 있다. 여기에서 강조해 두어야 할 점은 가행이란 순전히 물리적인 마당에서 생리적인 행동 지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동의 차원만으로는 맨 처음의 가행이 결정될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동기, 곧 가행의 의사가 발동된 의식의 맨 처음이 가행의 맨 처음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인과관계로 연결된 세상에서 가행자를 특정한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곧 어느 시점, 어느 행위를 가행의 시초로 보느냐에 따라 가행자와 피행자의 위치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 응보의 개념 적용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이에 상대의 보상 행위에 대해 이쪽에서 다시금 보상으로 응수하는 [응보(應報)] 행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계속된다. 


안갚음에는 다시 안갚음으로 앙갚음에는 또다시 앙갚음으로 되돌려 주려 하는 것이 보상 정애의 속성인 까닭에 응보에 다시 응보가 계속 이어지고 보은에는 보은이라는 선순환이, 보복에는 보복이라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특히 부정적 보상의 경우, 보복의 대상에 대한 응보의 되풀이로 앙분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지지 않으려 하는 자존심의 특성상 상대방의 <유(有)- >값을 더 올려서 부정적 상태에 빠트리려 하여 응보가 더 거칠어지므로 앙분을 점점 격화시켜가며 대(代)를 이어 복수전을 전개하는 일도 흔히 있다. 


유교에서 오경의 하나로 치는《예기(禮記)》에는 복수를 공공연히 조장하는 구절이 있기도 한데 자기의 부모를 살해한 자를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자)]라고 하여 대대로 복수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피행자는 가행자의 행동에 대해 노려보거나 모욕을 주거나 심술을 부리거나 해코지하거나 대상의 실수에 대해 잘코사니를 외치거나 비난하거나 심하면 가행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죽이는 등의 복수나 보복 등 극단적인 보상[보복]도 불사하며 앙갚으려 한다.


보상 정애에서는 보상 정애가 가행자와 피행자 모두에게 지향되며 가행자가 피행자에게 또는 피행자가 가행자에게 갚거나 되갚는다. 이런 고리가 무한하게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 그 힘이 다하면 끝이 나기는 하지만 앙분의 기력이 남아 있으면 응보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다.     


마음 또는 보상 정애의 상승효과와 상쇄 효과

사람끼리의 사귐에서는 내가 남에게 잘해주면 남도 나에게 잘해주는 등으로 안갚음이나 사랑에 서로 긍정적인 관계가 이어지는 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에 반해 내가 남에게 잘못하면 남도 나에게 잘 해주지 않아 서로 사이에 관계가 날로 악회되는 부정적인 관계, 곧 상쇄? 효과가 나타난다.    

 

위에서 초든 [긍정적 보상]이란 그 성격에 대한 만인의 호혐(好嫌)에 따라 바람직하여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 긍정적[좋은 업(선업(善業)] 또는 덕[또는 선덕(善德)]인 보상이 따르고, 싫어서 꺼리는 부정적[나쁜 업(악업(惡業), 또는 악덕[(惡德)]에는 [부정적 보상]이 따른다. 


곧 정애를 포함한 모든 감정, 아니 모든 행동이 그러하듯이 보상에도 당연히 바람직하여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 [긍정적 보상]과 싫어서 꺼려하는 [부정적 보상]이 있다는 뜻이다. 


보상은 적이나 경쟁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롯해 부모 자식이나 동류들, 친구나 사제 사이에도 적용되는 강력한 감정(정애)으로 인간은 아주 사소한 일에 관한 보상으로부터 세계대전을 불러올 만큼 강렬한 보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에서 보상 정애를 나타낸다. 보상은 또 인간뿐만 아니라 생물 전반, 특히 동물들에게도 나타나는 정애로, 사랑과 맞먹을 만큼 강력한 현상이다,    


처지 평가적 보상 정애

필자는 졸저❰인성론❱우월성[주관적 우월성]에서〘처지 평가(處地 評價)〙라는 개념을 제시 한 바 있다. 처지 평가란 사람들이 남의 업적에 대해 우열을 평가할 때 성취한 업적 그 자체의 성과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업적을 이루기 위해 임자{성취의 주인공}가 봉착한 처지에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있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중시하는 주관적인 평가 기준의 하나이다. 

     

베풀거나 갚음에서도 베풂과 갚음의 직접적 내용도 중시되지만, 보상의 주체인 나와, 보상의 대상인 남의 처지에 따라서 보상 값의 정도를 달리 평가한다. 처지 평가의 [임자]가 이룩한 성과는 평가의 직접적인 내용이 된다.      


보상에서의 형평 원리의 준칙 역시 그 직접적인 대상은 베풀어진 사태의 내용이며 이 내용은 매우 객관적인 값을 지니지만 그 당시의〘가행자〙나〘피행자〙의 정황, 곧 처지에 따라서 그 값이 크게 달라지는 처지 평가에 따른다. 


피행자가 당시에 겪는 정황이 매우 괴롭고 타개하기 어려운 처지였다면 가행자가 베푸는 행동의 내용이 적었다해도 높은 값으로 평가되며 가행자 말고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방법으로 바꿔 채워 넣을 수 있었다면 그 값은 낮아진다. 곧 대체할 수 있는 보상이나 부수적인 보상은 값이 적다.


또 처지 평가가 그러한 것과 같이 가행자가 헤치기 어려운 처지에서 베푸는 덕은 넉넉하면서 베푸는 덕보다 높은 값으로 평가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찮은 도움도 큰 은덕으로 여겨지며 은덕을 베푸는 사람이 그 역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면 은덕은 더 크게 느껴진다. 


난타(難陀)*는 그녀가 매우 어려운 처지인데도 공양했기 때문에 강풍이 불어 다른 등불이 다 꺼졌는데도 홀로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난타: 불경(佛經)인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동냥으로 받은 한 푼의 돈으로 등불을 사서 불타에게 공양했다는 고사성어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주인공. 

    

아마도 보답은 보은의, 그리고 복수는 보복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보은의 대상을 「은인(恩人)」, 복수의 대상을 「원수(怨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나타내는 이름이 적지 않은데, 여러 이름 중에서 필자는 긍정적 보상을 나타내는 데에는 주로「보답(報答)」이라는 낱말을, 그리고 부정적 보상에는 주로 「보복(報復)」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은수(恩讐)는 바로 이러한 보답과 보복 행위 및 그 대상자를 뭉쳐 부르는 이름이다. 이러한 보상들은 모두 순리적인 형태의 것이다.      


()과 과()

이 낱말들은 보상의 원인이 되는 맨 처음의 업[業: 가행자의 가행 행동]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 업에 대한 피행자의 보상[갚음] 행위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같이 쓴다. 그리고 업에 대한 보상, 특히 도덕적 업에 관한 결과를 [과(果)]라고 부르며, 따라서 오랫동안 불교에 심취해 온 한자 문화권에서는 선행에 대해서는 [선과(善果)]가, 악행에 대해서는 [악과(惡果)]가 내릴 것이라는 뿌리 깊은 연기(緣起)의 관념이 있다. 


이에 대한 보상에는 사소하게는 웃어준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거나 고개를 숙여 절을 하거나 칭송을 하거나 선물을 주거나, 포상하거나 박수를 치는 등의 보답이, 크게는 자신의 이익을 침훼 당하는 것도 불사하며 갚아주려는 희생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베푼 은의를 스스로 생색내며 자랑하는 [공치사]를 하면 은의는 반감된다.      

보답과 보복은 보상심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 뿐 이 두 개념이 각각 별도의 심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심적 활동의 양 방향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한 굴대의 두 바퀴[동축(同軸)]의 양륜(兩輪)]라고 부른다.⸺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곧 복수심을 일으키는 정애가 보은심을 일으키는 정애와 똑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수심이 강한 사람은 보은심도 강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자주, 또는 늘 잊고 있기 때문에 이론상, 또는 실천 상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일이 대단히 많다. 


이러한 잘못은 특히 교육적 측면에서 흔한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흔히 보복을 악덕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보은을 인륜으로 강조하는 경우이다. 곧 은혜 갚기를 강조하면서 보복은 금지시키려고 하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문제는 보은의 발로를 촉구하고자 하면 불가피하게 한 굴대(동축)의 또 다른 바퀴 쪽인 보복도 같이 강화되기 때문에 두 가지 가운데 한쪽만을 실현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철저히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권유에는 “좋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원수를 철저히 증오하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위에서 보여준 범수의 사례는 이에 관한 적절한 실례가 될 것이다.     


역보(逆報거슬러 갚음 

배은망덕(背恩忘德)과 이덕보원(以德報怨)및 [반보(反報)ㆍ되갚음]

일반적으로 보상은 청정적(淸情的)으로, 곧 긍정적 업에 대한 긍정적 보상, 부정적 업에 대한 부정적 보상이 순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가끔은 탁정적(濁情的)으로, 곧 긍정적 업을 부정적으로 갚거나 부정적 업을 긍정적으로 곧 역리적으로 갚는 일도 일어난다. 


바꿔 말하면 은덕을 오히려 악덕으로 갚거나 원수에게 은덕을 베푸는 일이 있다. 순리적인 보상을 벗어난 이러한 [역리적 현상(逆理的 現象)]을 필자는 [거슬러 갚음(역보:逆報)]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보상에는 순리적인 보상 밖에 역리적인 보상이 있을 수 있어서 갚음에 대해 해분책을 내어놓기는커녕 오히려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일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곧 은인에게 그에 합당한 보답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해치거나 모른 체하는 경우도 있고 원수에게 복수 대신 오히려 사랑으로 감쌀 때도 없지 않은 바이다. 특수한 경우로 [발등 찍기]가 있다. 자기에게 베푼 은혜를 도리어 앙화로 되갚는 경우이다.    

  

역보에는 이와 같은 2가지 경우가 있다,      


거슬러 앙갚음 잘못을 저질러 놓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은덕을 입은 사람이 오히려 그 은덕을 앙화로 갚는다[배은망덕]. 또는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매를 든다(적반하장(賊反荷杖)”는 태도.     

긍정적 거슬러 앙갚음

부정적 거슬러 앙갚음

♣은덕을 입은 사람이 은인(恩人)에게 보은하듯이 해를 끼친 사람이 피해자에게 미안함을 품고 덕을 베풀기도 하는      

[거슬러 안갚음위와는 반대의 경우로 예수의 교훈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처럼 원한(怨恨)을 오히려 은덕(恩德)으로써 갚는 것을 가리킨다. 한자로 보원이덕(報怨以德) 또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이라고 하는 것으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말은 원한(怨恨)이 있는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고 덕을 베푼다는 뜻이다.  


긍정적 보상인 은덕을 갚지 못한 경우에도 앙분이 쌓이는데 은덕을 갚지 못하면 서운한 마음이 생기면서 짐을 진 것 같이 기분이 찜찜한 것 따위가 그것이다.

      

긍정적 거슬러 안갚음 

[소극적] 은의를 베푸는 가행자도 상대가 지나치게 고마워하여 쌓일 응보가 부담이 될 수 있는데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은의가 크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약소합니다. 고마워할 것 없어요.” 등.  

   

부정적 거슬러 안갚음          

보상 정애 때문에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 비해 훨씬 많은 공격적 행위가 발생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응당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러한 응보에 대한 관념 때문에 인간의 많은 공격적 보복 행위가 자제되기도 한다. 


피해자의 보복은 이승에서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저승에서라도 지속될 것이라는 관념이 있다. 곧 죽은 유령은 죽어서도 보복을 계속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으며 원귀(怨鬼)는 생존 때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야멸찬 보복을 할 것으로 여겨 매우 두려운 존재로 표상되고 있다.     


집단적 보복과 보답

이미 초들은 바이지만 모든 정애가 그러한 것처럼 보상 정애도 심원층과 평가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보상의 심원층은 상대방 의지의 동향에 따라서 형성되며 평가층은 상대방의 용재와 용질의 동향에 따라서 형성된다. 보상의 심원층을 형성하는 의지는 정애의 쌍방 간에 우호적 관계 및 대립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은수(恩讐)라고 부르는 격정의 정애가 바로 이러한 심원층적 보상에서 촉발되는 감정이다. 보상에도 층위가 있다.  

   

안갚음 강요

앙갚음을 강요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안갚음을 강요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자기의 적선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적선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짓이다. 적선은 이타성에 따라 베푸는 일인데 [호혜적 이타성]이 아니면서도 뒷날의 보상을 바라는 것은 진정한 적선이나 이타성의 정신에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가끔 시혜의 대상에게 자신이 역보적 시혜를 입고 이를 갚기가 어려워 서로의 시혜를 상쇄하려는 방편으로 예전의 시혜를 갚아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도 사실 궁색한 짓일 뿐이다. 시혜를 갚는 것은 의무나 부담 지우기가 아니기에 이는 시혜를 입은 사람의 자발적인 의사에 맡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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