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공정
2024년 12월 3일 밤은 역사책에 기록될 날이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TV 뉴스 특보를 통해 지켜봤다. 자못 비장한 표정을 갖춘 그는 자기를 믿어 달라며 큰 뜻을 품은 듯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누가 반국가 세력인지가 분명해질 즈음에 국회에선 만장일치로 표결이 완료되어 상황이 종료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오늘까지, 아니 앞으로 상당한 시간 동안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질 듯하다.
큰걸 말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큰 일은 쉽고 간단히 이룰 수 없다. 때때로 희생이 필요하다. 큰걸 말하는 사람은 교묘하게 희생을 강요한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데 그 희생은 너희들이 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큰걸 말하는 사람을 보면 경계부터 하게 된다.
재규어라는 승용차가 있다. 그다지 흔치 않은 외산차이고 디자인이 예쁘다(솔직히 은색 재규어 앰블럼만 예쁘다). 그 차가 예약 주문이 들어왔다. 내 나이 또래의 남자 차주분이 무척 친절하게 차키를 넘겨주며 잘 부탁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에 어떤 일을 하셨냐, 힘드시진 않으냐 등등을 물었다. 세차를 마치고 연락을 하니 다시 내려온 고객은 음료수를 건네주며, 이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있다고 한다. (슬슬 경계심 발동) 어떤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이어서 말을 한다. 그 일은 외모관리 좀 하고, 센스 있게 옷을 입고, 입담이 좋으면 된단다. 외모, 센스 있는 패션에서 낙제라고 말하니 무슨 말씀이냐며 조금만 가꾸고 관리하면 된다길래 (기생 오래비)도 아니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짐작은 가지만) '인X덤'이라고 한다.
TV광고에서 들었던 브랜드였던 것 같기도 하다. 팸플릿 몇 장을 주고, 카카오 채널을 열어 보여 준다. 카카오 채널 화면 안에는 신중년 남자들이 잘 빠진 슈트를 입고 자기 수입을 자랑하고 있다. 강남 번화가에서 봤을 법한 성형미인은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연봉을 자랑하고 있다. 고객께서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하니 생각해 보겠다고 하며 물러나왔다. 차를 몰아 나오며 생각했다. '그렇게 좋으면 혼자 하시지... 뭘 나까지'
내 또래 남자라면 국민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정신없이 맞아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선생님에게 얻어터지면 아픈 것보다는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한 게 없어도, 맞으면 잘못한 아이가 된다. 별것도 아닌 일로 많이도 맞았고 친구들이 맞는 걸 지켜봐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의 매는 아니었다. 그 시절 문화가 그랬고, 무력하기만 한 학생은 교사의 폭력성을 드러내 욕구를 실현하기 쉬운 좋은 먹잇감이었다. 국민학교 2, 3학년 때 생각했다.
'말로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데 왜 때릴까?'
'저기 앞에 가는 덩치도 크고 어른스러운 5학년, 6학년 형이 되면 안 맞겠지?'
'저 형아들은 말로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고 선생님들도 생각하겠지?'
6학년이 된 나는 더 많이 맞고 있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누군가 교실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다 같이 떠들다 선생님이 들어오신 것도 모르고 계속 떠든 녀석이 본보기로 맞았다. 시험 성적표를 나누어 주는 날은 아예 대걸레 자루를 들고 담임은 들어온다. 그렇게 야만의 시대를 살았고 이젠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엊그제 장님 무사가 나타나 또다시 야만의 시대로 이 나라를 몰아가려고 했다. 민주와 평화라는 것이 어떤 지점에서 시작하여 우여곡절을 겪다가 어느 날 쟁취된 이후 쭉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살아보니 정의? 공정? 이 따위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저 스스로가 남이 안 보더라도 작은 일에도 정의를 지키고, 공정을 지키면 된다. 남더러 정의를 지키라고, 공정하라고 하지 말고, 자기가 하면 된다.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내가 아닌 남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다. 상대가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조금 참다가, 안 보면 그만이다. 그런 몰상식한 사람에게 공정과 상식을 얘기할 만큼의 인류애가 내게는 없다. 물론, 안 볼 수 없고, 계속 당한다면 싸워야 한다. 그러니 '정의', '공정'을 입 밖으로 떠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낮에 소상공인들에게 자기만 믿으라고 하면서 DJ까지 했던 그가 저녁에 저지른 일 때문에 소상공인들은 안 그래도 어려운데 설상가상으로 작살이 나고 있다. 배신과 위선, 기득권의 유지에 힘쓰는 정치인들의 뉴스가 이어지는 가운데 작은 꼭지로 소상공인 뉴스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이번 사태의 여파로 각종 연말모임, 회식이 취소되어 연말에 얼마라도 기대했던 자영업 소상공인들의 한숨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 역시 주문이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