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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받은 책과 타월의 죽음

'하자'와 '잉여'

by 양우정

직장을 다닐 때부터 취미 삼아 주말이면 서점에 갔습니다.

결핍된 지식과 현재의 불안감은 희한하게 서점에 가면 줄어듭니다. 매대에 누워있는 신간의 제목을 훑어보다가 나의 현실에 필요한 책의 제목을 발견하면, 마치 산행할 때 숨이 차오르는 깔딱 고개에서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금방이에요"라는 말을 해주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사모은 책들은 쌓여가고, 읽지 못한 책들이 옆으로 누워서 저에게 '읽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나를 데려왔나?'라고 항의를 하는 듯 보였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했고, 제가 찾은 방법은 스캔이었습니다.


처음엔 책의 묶인 부분을 잘라내고 적당량을 스캐너에 꽂으면 되는 방법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종이가 걸리거나 순서가 뒤집히는 경우가 많고 스캔 후 책을 버리는 게 아까워서 10년 전부터는 북스캐너를 사서 제본을 뜯지 않고 직접 손으로 한 면 한 면 뒤집어가며 스캔을 합니다.


그렇게 스캔을 마치면 분류된 파일명을 붙여 외장하드에 저장하고, 모니터로, 탭으로, 휴대폰으로 읽고 있습니다. 책을 사면 우선 스캔부터 하고 봅니다. 가끔은 스캔을 하러 책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스캔을 마친 책들을 모아서 중고책 서점, 알라딘에 갑니다. 알라딘에서는 중고책을 구매할 수도 있고, 가진 책을 팔 수도 있습니다. 집에 있는 책이 5단 책꽂이에 차 올라서 옆으로 수납해야 할 때쯤이면, 저는 대부분의 책을 캐리어에 싸들고 가서 팔곤 합니다.


직원이 볼 수 있게 올려놓으면 직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원이세요?"

"네"

"생년월일을 입력해 주세요"


"책은 상태에 따라 최상급, 중급, 하급의 3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재고량이 많은 책은 매입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얼룩, 찢어짐, 곰팡이가 있는 책은 매입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시작할까요?"


"네"


직원은 책을 한 권 한 권 눈으로 살피며 3가지로 분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간혹 얼룩이 있는 책을 저에게 돌려줍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얼룩이 있는 책, 필사책이나 따라 쓰는 그림책에 무심코 쓴 연필의 흔적도 직원은 용케 찾아내어 저에게 다시 돌려줍니다.


'촤르르'하고 책을 넘기며 매의 눈으로 검사합니다. 눈으로 하는 평가가 끝났고, 저에게는 '하자' 있는 책, 8권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 직원은 책의 바코드를 찍습니다. "띡"하고 바코드 스캔하는 소리가 나면, 제게 보이는 모니터에 금액이 찍힙니다. 어떤 책은 천 원, 또 다른 책은 삼천 원, 의외로 낡은 책이 만 원이 찍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직원은 "이 책은 재고량이 많아 매입이 불가합니다" 라며 책을 돌려줍니다.


이렇게 저에게 다시 돌아온 책은 5권입니다. 아까 눈으로 하는 검사에서 돌려받은 책과 합치면 13권의 책이 매입을 거부당하고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직원은 금액을 정리하고 있고, 저는 돌려받은 책에 대해 생각합니다. 얼룩과 재고가 많아서 저에게 돌아온 책은 알라딘에 돈을 받지 않고 두고 올 수도 있습니다. 재고가 많아 매입이 안 된 책은 다른 알라딘 지점에 가면, 어쩌면, 팔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순간, 돌려받은 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책에 있는 얼룩은 상품의 '하자'이고, 재고가 많다는 것은 '잉여'입니다. 돌려받은 책이 내 모습, 지금의 내 처지 같아서 묘한 연민이 느껴집니다.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자'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1등만 살아남는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의 전생애에 걸쳐 '침묵하는 다수'였고,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직업을 가졌던 저는 '잉여'이기도 합니다.


값이 매겨져 팔린 책들은 제가 받은 금액보다 비싼 요금으로 진열되어 다시 독자들을 기다리겠지만, '하자'와 '잉여'로 낙인찍혀 돌아온, '거부당한 책'의 운명은 제 손에 달렸습니다.


물론 책이 스스로 자신이 '거부'당했다고 의기소침해하진 않겠지만, 동지의식이 생긴 저는 다시 책을 집에 가져와 책꽂이에 높이를 맞춰 다시 꽂아둡니다. 그래서 지금 제 책꽂이에는 하자와 잉여의 책들만 남아있습니다.


출장 세차를 할 때, 스팀을 쏘며 도장면에 밀착시켜 닦아내는 타월은 부드러운 극세사입니다. 도장면에 스크레치가 나지 않도록, 가지고 있는 타월 중 최상급을 씁니다. 타월의 털 사이에 이물질은 없는지 일일이 검수도 합니다.


여러 차례 사용하고, 빨아서 사용하면 타월 모가 닳아서 거칠어집니다. 그런 타월이 점점 쌓여 갑니다. 모가 닳아서 거칠어진 것은 '하자'이고, 그런 타월이 많아지는 것은 '잉여'입니다.


그렇게 '하자'와 '잉여'가 된 타월이 마지막에 제 몫을 다하는 코스가 있습니다. 타월 입장에서 볼 때, 그곳은 '라스트 댄스'의 무대입니다. 그 무대는 바로 찌든 때로 범벅이 된 타이어 휠입니다. 대부분의 타이어 휠에는 브레이크 라이닝에서 나오는 쇳가루와 각종 이물질이 엉겨 있습니다.


운전자가 차 안에서 눈, 비를 맞지 않고 안락하게 운전할 때, 타이어 휠은 거친 도로 위에 밀착되어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낸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고객들 차에 있는 타이어 휠은 본래 은색의 빛을 잃고, 검은 그을음으로 덮여 있습니다.


어떤 고객들은 특히 '휠'을 신경 써 달라고 합니다. 또 어떤 '세차환자'들은 '세차의 완성은 휠이다'라고도 합니다. 세차 후, 외관은 깨끗한데 타이어와 휠이 더럽다면 쫙 빠진 정장에 신발은 진흙이 묻은 장화를 신은 격이기도 합니다.


휠을 닦은 타월은 쇳가루와 검댕이 묻어서 빨아 봐야 기름얼룩이 남아 있기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하자'와 '잉여'가 된 낡은 타월은 기특하게도 가장 더러운 곳을 가장 깨끗하게 해 주고 장렬히 산화하여 종량제 봉투라는 관으로 들어갑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본 차량의 타이어 휠이 유난히 반짝이면 '와 멋진데?'라는 생각보다는 저 빛나는 휠을 만들고 생을 마감한 타월을 떠올리곤 합니다. 일종의 직업병이지요


상-중-하

기-승-전-결

생-로-병-사

발단-전개-절정-결말


'상-중', '기-승-전', '생', '발단-전개-절정' 까지는 멋모르고 까불거나 즐겁거나 노력하거나 매진하거나 하더라도 종국에는 '하', '결', '로-병-사',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책도, 타월도, 사람도 피해 갈 도리는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의 마무리는 가장 더러운 곳을 가장 빛나게 해주는 타월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죽기 전에 휠하나쯤 반짝이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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