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진천 편이라니...
어릴 적 기억 속의 경주 불국사는 엄청나게 큰 곳이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러 가는 길이 제법 길었던 걸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가 커서 다녀온 불국사는 이곳이 어릴 때 내가 왔었던 그곳이 맞을까 의심이 될 정도로 작았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다녀온 불국사의 크기는 예전보다도 더 작아져 있었다.
슬프게도 나의 키는 국민학교 6학년 이후로 멈추었다.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면서 체형은 바뀌었지만 몸무게는 그때보다 조금 더 나갈 뿐이다. 나의 키와 몸무게는 어린 시절 그때와 비슷한데 그렇게 커다랗던 불국사는 왜 이렇게나 작아졌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내 생각보다 많이 컸나 보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커진 것이다. 나의 몸은 그때와 같지만 그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이 차이가 그렇게 커다랗던 불국사를 작게 만들었을 것이다.
세월은 나를 성장시킨다.
그 사실이 늙어가는 이 세월을 마냥 야속하지만은 않게 만든다.
부산에서 살았던 나는 여행으로 경주를 자주 갔었다. 언제 한 번은 태풍으로 인해 석굴암으로 가는 차도 일부가 유실되어 차량이 통제되었다. 그래서 토함산을 걸어서 석굴암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가족이 힘들게 산에 올라왔다며 석굴암 관리하시는 분이 유리문을 잠시 열어 주시며 후딱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특혜를 주셨다. 다른 사람들은 가보지 못하는 곳을 가봤다는 그 짜릿함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용담 같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여행은 보는 것이다. 마치 그 동네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갔으면 그 주변의 것들을 다 보고 와야 직성에 풀렸다. 항상 바빴고 여행 가기 전 미리 정보를 다 알아보고 동선을 짰으며 볼거리를 정했다. 그래서 남편이 무슨 수학여행, 패키지여행을 왔냐고 늘 핀잔을 주었다.
그에 반해 남편의 여행은 쉼이다. 자연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놀고 쉬는 것을 지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정해졌고 그것이 계속되어 오다가 최근에서야 조금씩 나의 여행에서도 쉼이 늘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도 그 쉼이라는 것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었고 휴식을 즐길 수밖에 없는 체력이 된 것이다.
2022년 7월 군산, 2023년 6월에는 단양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된 이후로 동네에서 친해진 언니들과 1년에 1번, 1박 2일 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시누와 시누 친구와 함께 다녀온 2022년 설악산 케이블카와 고성 통일전망대, 2023년 철원 잔도길과 강릉 아르떼뮤지엄도 한편으론 불편했지만 좋았다.
아이들과 남편이 없으면 여행 경비는 상당히 저렴해진다. 집에서 싸 온 먹거리로 아침을 해결하고 점심은 현지식, 저녁은 지역 중앙시장에 들러 음식을 사 온 후 간단 맥주와 함께 숙소에서 먹는다. 그리고 남은 음식이나 게스트룸에서 준비된 간단 음식으로 다음날 아침을 해결하고 그날 점심만 사 먹으면 저녁은 집에서 먹을 수 있다. 숙소도 잠만 잘 수 있으면 된다. 인기 관광지를 가는 것이 아니어서 입장료나 주차비도 거의 없다. 1인당 10만 원 정도의 1박 2일 여행이 가능한 것이다.
2024년 5월 이번 여행지는 진천이었다.
여행을 함께 떠나는 언니들의 남편들이 거기 뭐 볼 게 있다고 진천에 가는 거냐고 물었다. 하루 만에 보고 올 수 있는 곳을 굳이 1박을 해야 하는 거냐고도 물었다. 엄마들끼리의 여행을 허락하면서도 질투를 하신다. 그냥 집에서 비교적 가깝고 붐비지 않고 이럴 때 아니면 잘 안 갈 거 같은 곳을 선택한 거라고 했다.
1박 2일 동안 배티성지, 보탑사, 농다리와 미르 309, 배곡저수지, 대한 성공회 진천 성당, 한반도지형전망공원을 들렀고 중앙시장에서 먹거리를 샀고 카페에도 들렀다. 배티성지를 갔다가 바로 보탑사를 간다는 건 일행들이 종교에 자유로워야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경로이다. 배티성지에서도 초를 켜서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고 보탑사에서도 불전을 넣고 절을 하며 가족의 안녕을 빌었으며 종박물관에서 타종을 하면서도 가족의 안녕을 생각했다. 여행을 가서도 엄마는 엄마이다. 배티성지의 산상제대와 보탑사 목탑 3층 미륵전은 이번 여행에서 인상이 깊었던 경건한 마음이 드는 곳이었다. 한반도지형전망공원의 노을이 이쁘다고 들었지만 첫째 날 오후부터 비가 와서 보지 못했고 둘째 날 오후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 일부러 셔틀버스를 타려고 일정을 변경해서 시간에 맞춰 줄을 섰다. 그런데 셔틀버스가 오자마자 지인 중 한 분만 줄을 서고 나머지는 정자에서 쉬고 계시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 버스를 탔다. 그 모습을 보고 계시던 우리 뒤에 계신 분들도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버스로 달려가셨다. 순간 줄이 없어진 것이다. 입석으로도 가기만 하면 된다 생각에 기다렸다 탔더니 좌석에 앉지 못한 우리 보고 내려서 다음 버스를 타란다. 타임테이블상 다음 버스는 1시간 뒤였다.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냐고 항의를 하자 관계자 분들이 요즘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오고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통제를 미리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만 하셨다. 그리곤 자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우리 보고 이해를 하란다. 여기서 1시간을 기다리라고? 그건 아닌 것 같아 걸어올라 가면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걸어가긴 힘든 길이라고 하셨다. 셔틀버스 시간 맞추려고 포기했던 일정들이 생각나 화가 났다. 억울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으니 버스가 30분마다 올 거라고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빨리 올 거라고 협조를 해달라고 하셨다. 평소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았는데 몇 주전 1박 2일 방송이 나간 뒤로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단다. '아... 그래서 어제 갔던 농다리에도 사람이 그렇게 많았구나.' 이곳의 조팝나무 군락지도 1~2주 전쯤이 절정이었다가 지금은 지고 있어서 안 그래도 아쉬워하던 참인데, 나름 조용한 곳이라고 느긋하게 즐기려고 찾아온 곳이었는데 난데없는 1박 2일이라니... 방송의 위력이 무섭긴 무섭구나.
여행을 가면 뜻하지 않은 사건과 그로 인해 평상시와는 다른 경험들이 생긴다.
MBTI 극 I의 나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집 밖을 안 나갈 자신이 있다. 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가고 싶다.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함이 있고 평소에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여행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벌써부터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게 된다. 동네 언니들과의 1박 2일은 언제까지 갈 수 있게 될까? 오랫동안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