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인터넷에서 뭘 팔아보겠다고 말했을 때 시어머니의 반응은 ‘딱’ 이랬다.
“말이 옛날 인터넷 쇼핑몰이지..” 그 당시 남편의 급여 상황은 중소기업에서
200만원남짓.
물론 실 생활비는 이보다 더 못 할 때도 많았다. 난 육아휴직 후 복귀를 포기하고
이제 이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지자가 필요했다. 당시 남편도 그리고 내 주변 어떤 사람도 딱히 내 의지를 높게 사진 않았다. 이해는 한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 내가 가진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버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이미 그들의 입장에서 난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망한 사업자 그 자체다.
내가 자란 가정의 분위기는 꼭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일을 하며 사는 게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반면, 어머님은 아니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여자는 배 아파 자녀를 낳아 기르고 남자는 이마에 땀 흘려 일하는 고통을 원죄로 받았다”
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모종의 복수심과 의지에 불타오르게 되었다. 어쩌면 허망하고 실체 없는 지지보다 훨씬 어떤 의미에서는
나은 디딤판이 되었던 것 같다.
라고 생각해 본다.
그렇게 2017년 블로그를 시작했다.
처음엔 아무거나 적었다. 콘텐츠가 없어서 가족과 다녀온 모든 곳을 떠들어 댔다.
남양주 카페에 갔던 이야기, 아이가 먹는 이유식, 심지어 주방에 있는 양념통에 라벨링을 했던 모든 삶에 소소한 소재를 블로그로 요리했다. MSG도 부어가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웃을 추가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아다녔다. 물론 집 밖에 나가지 않을 수 있어서 가능했다.
인터넷이 희망이었다. 나는 돌도 안된 아기를 안고 친정과 멀리 떨어져 살았다. 가까운 친척도, 친한 친구도 없다.
아침 8시에는 집에서 나가 저녁 8시에 들어오는 남편 말고는
<어른사람> 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1도 없었던 말 그대로 독.박.육.아를 하고 있었다.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전혀 불가능했다.
빠빠, 맘마, 움파룸파(?) 같은
의성어들을 하루 12시간 들었다.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춤추고 있노라니
이성을 잃어갔다.
아마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자주 들어가던 맘 카페나 대형 카페에 블로그를 홍보했다.
1시간도 안되서 아이디가 정지를 먹었다.
좌절하지 않고 그렇게 야금야금 몇 개월에 걸쳐 노력한 결과!
200명이 넘는 이웃이 나의 블로그를 구독해 주었다. 하하하하. 무슨 200이란 숫자에 누가 접착제를 붙여 놓은 건가. 월급도 200 이웃도 200 라임이 딱 맞는다.
생각을 바꿔야 했다. 혼란스러웠다. ‘블로그가 아닌 건가. 블로그로도 분명 수익이 난다고 했었는데..’. 내가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내야만 했다.
이렇게 이대로는 살 수 없었다. 사실 우리 둘만 산다면 아끼며 살면 상관없을 일이다.
이미 땅에 태어난 내 자식이 살아갈 환경은 망할 겨울에 입김나오는 신림동 필로티 빌라가 아니길 정말 간절히 바랐다.
(2편에 계속)